둘레돌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신라문화 절정기 보여줘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 소재 사적 제23호 경덕왕릉.

제34대 효성왕릉(孝成王陵)은 전해지지 않아 제35대 경덕왕릉(景德王陵)을 가보기로 했다. 경덕왕은 성덕왕(聖德王)의 넷째 아들이며, 소덕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김헌영이다. 효성왕의 동복 아우인 그는 파진찬 벼슬에 있다가 효성왕 재위 3년인 739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742년 5월에 효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덕왕릉이 있는 내남면 부지리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다른 동네로 들어갔다. 동네 한 가운데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왕릉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돌아 나오다가 경운기를 몰고 가는 농부 아저씨를 불러 물었다. 덜덜 거리는 소리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친절한 아저씨는 경운기 소리를 줄이고 가르쳐 주신다. 돌아나가서 굴다리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라고.

혼유석

안내를 받아서인지 왕릉 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산 밑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나서는데 길 양옆에는 일부러 몸을 비튼 듯 구불구불 자라난 소나무들이 색다른 풍경으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길 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바로 저기구나 싶다. 소나무 숲길의 끝부분에 마치 하늘의 빛을 모으고 있는 듯 환한 곳이 있다. 경덕왕릉은 따사로운 오후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둘레석이 있는 경덕왕릉은 무척 정갈해 보인다. 돌난간도 잘 정돈되어 있다. 기둥인 석주가 검은 빛을 띄우는 것을 보면 세월을 읽을 수 있지만 기둥사이에 끼운 돌살대는 근래에 다시 정비한 듯 하얗다. 잘 갖추어진 능인 것 같지만 능을 지키는 문인석과 무인석, 돌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신라 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왕이었는데 전대와 후대에서 볼 수 있는 석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의외다.

십이지신상과 난간

왕릉답삿길에 가장 자세히 보고 있는 안내판을 들여다보았다.

신라 경덕왕릉(景德王陵)

사적 제23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

이 능은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김헌영)을 모신 곳이다. 구릉 경사면의 흙을 편평하게 깎아 축조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교대로 세우고, 탱석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복(武人服)을 입고 무기를 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경덕왕조에 "모지사(毛祗寺) 서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며, 『삼국유사, 三國遺事』왕력(王曆)에 "처음에 경지사(頃只寺)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뒤에 양장골 가운데에 이장했다."고 전한다.

경덕왕은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가의 제반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완비하였다. 굴불사(掘佛寺)와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대종과 성덕대왕 신종도 만들었다.

문화의 꽃이 활짝 핀 경덕왕 때는 뛰어난 예술가들도 많지 않은가? 황룡사의 벽에 소나무 그림을 그린 솔거가 있다. 새들이 진짜 소나무인 줄 알고 날아와 앉으려다가 부딪히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글씨를 잘 써서 '해동서성'이라고 불리던 김생, 먼저 죽은 누이를 생각하며 '제망매가'라는 향가를 지은 월명스님도 있다.

남편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면서 '제망매가'를 읊조린다.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월명 스님은 보고 싶은 누이를 만났을 것이다. 만남은 헤어짐을 염두에 두고 헤어짐은 만남을 예견하는 것임을 진작 알았으니 그리움의 아픔도 덜었으리라. 지금은 누이와 함께 무릉도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덕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겠지.

훌륭한 예술가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덕을 가졌던 경덕왕의 공이 아니겠는가. 경덕왕에게는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충신 이순이 있었다. 경덕왕이 향락에 빠지려고 할 때 바른 말로 고치게 하고 나라 다스리는 바른 도리를 강의했다. 그런 충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경덕왕이었기에 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태어났을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는 올라갈 때 보지 못한 도라지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후손들은 그 옛날처럼 지금도 경덕왕이 고이 잠든 능 밑에서 이렇게 밭을 갈며 살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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