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경주 양동마을 전경.

양동마을에 사람이 언제부터 정착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청동기시대 묘제인 석관묘가 안산(案山)인 성주산 정상 구릉지에 100여기나 있고 고고학계 보고로는 기원전(BC 4C 이전)에 거주가 시작됐다고 본다. 또 이웃 안계리 고분군(古墳群)으로 미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께 상당한 세력의 족장급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뤘다고 하지만 확인 자료는 없다.

경북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거주했고,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서 살았으며, 이어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이곳으로 이주해 처가 재산을 상속받아 살게 됐고, 후에 공신이 돼 고관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중 장녀와 결혼해 영일(迎日)에서 와서 살았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날 양동마을이 형성됐다.

중은 양동주 선생

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연유다. 조선초만 해도 남자의 처가살이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 후손은 절손돼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양동마을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됐다. 경주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인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500여년 전통의 유서깊은 반촌이다. 전통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대표 반촌으로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협조하며 500여년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 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있는 마을이다.

전국에 6곳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지만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 수와 전통성, 그리고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은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 찰스 황태자도 방문했다. 한국 최대규모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상류주택 등 고색창연한 54호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싼 고즈넉한 110여 호 초가로 이뤄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하인들의 주택은 낮게 에워싼 형국이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양 가문이 형성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했다.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쯤 떨어져 있으며, 뒷배경이자 主山(부모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 지세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네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 넘어 갈구덕으로 구성돼 있다. 마을에는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와가와 초가 등은 한 폭의 그림처럼 전통의 향기를 느끼게 해준다. 낮은 토담길 사이를 걸으면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다.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의 체험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www.yangdong.invil.org).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을 분석, 큰 용맥을 보면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이 백병산(白屛山, 1천259m)·백령산(白嶺山, 1천4m)·주왕산(周王山, 907m)·주사산(朱砂山)·사룡산(四龍山, 685m)·단석산(斷石山, 829m)·가지산(加智山, 1천240m)·취서산(鷲棲山, 1천59m)·원적산(圓寂山, 812m)·금정산(金井山, 802m) 등으로 약 370㎞에 이른다. 이러한 여러 중조산 산봉우리를 만들고 변화를 거듭해 성법령(기북→ 상옥리)에서 비학지맥과 내연지맥으로 갈라져 비학산(신광면 소재)에서 크게 기봉하고 다시 여러 맥으로 뻗어나가는데 그 중 남쪽으로 강하고 힘찬 지맥이 신광면 흥곡리를 거쳐 동으로 틀어 낮게 달려가 당미기재(우각리에서 냉수리로 넘는 재)에서 좌우로 물길을 갈라 놓는다. 즉 흥곡리 물은 신광천을 거쳐 흥해로 흐르고 냉수리 물은 기계천과 합류한다.

이곳에서 용맥은 다시 일어나듯 치켜들고 동으로 나아가 도음산을 만들고 좌우로 팔을 활짝 벌리듯 능선을 만들며 다시 남쪽으로 뻗어가는 용맥은 안계지와 양동마을을 경계로 하는 마을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을 만들었다. 이곳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산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많다. 일례로 물(勿)자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혈(血)자가 된다고 해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 양동초등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고 한다.

마을은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구성돼 있다.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해 모두 150여 호 고가옥과 초가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다.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의해 외부로부터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입구에서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고가들도 내부로 들어와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마을은 지형적으로 그리 높지않으면서도 자연환경과 집들이 조화를 이뤄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다.

풍수지리학적인 물길을 살펴보면 크게는 서쪽에서 흘러오는 경주천과 안강에서 흘러드는 물과 기계천에서 흘러오는 물이 형산강에서 합류해 모이는 그러한 형태다. 풍수지리학에서 물은 재물을 의미하고 양동마을과 안강 들을 감싸는 물길(수세)의 흐름구성을 볼 때 크게 세 곳에서 흘러드는 물은 급하게 흐르는 물이 아니며 잔잔하면서도 마르지 않는 깊은 물로서 양동마을로 재물이 들어오는 국세를 하고 있다. 물은 들어오는 것은 보이는 것이 좋고 빠져나가는 물은 보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수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아야 이를 암공수(暗拱水)라고 해 더 귀한 물로 친다. 역수가 마을에서 보인다는 것은 청룡, 백호가 마을을 완전히 감싸지 못해 수구가 엉성하고 넓기 때문이다.

양동마을 역수는 모두 마을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암공수다. 따라서 마을에서 보면 전체적인 수세 흐름은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점은 바로 건물 위치다. 양동천을 좌우로 낮은 곳 주택과 좌우 산 능선을 중심으로 한 높은 경사지에 양반가와 중요 건물이 지어져 있다. 높은 곳 건물 배치는 풍수지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선 형산강의 수해를 막기 위해서다. 형산강 물길은 경주천과 안강천 그리고 기계천이 합류한 물이 지금의 유강리 협곡에서 강폭이 좁아져 큰비가 오면 '삼천'에서 합류한 많은 물이 동해로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는 결속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건물을 수해로부터 보호받도록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골짜기 낮은 곳에 건물을 지으면 골바람에 거주자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 대표적인 건물중 한 곳이 서백당인데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설창산에서 고도를 낮춰 용맥의 폭이 넓게 내룡하는데 지현(之玄)자로 달려와 두툼한 귀봉을 만들면서 서백당 쪽으로 생룡맥이 내려온다. 지층 구조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안정된 구조다. 설창산에서 왼쪽으로 크게 감고 있는 성주산이 목성체로 해 사랑채의 안산(案山)이 되고 오른쪽으로 낮고 넓게 감아 서백당을 완전히 환포한 산맥이 백호가 되면서 안채의 안산이 된다. 이러한 강한 백호맥의 영향은 후손 중에 여손(女孫)이나 외손(外孫)이 발복을 받는다고 보는 풍수지리적 견해가 있다.

또 건물의 비보적인 배치는 전체적으로 'ㅁ'자형이며 특히 문간체를 길고 백호맥과 나란히 건축한 것은 백호맥이 낮게 형성된 곳으로부터 살풍을 막기 위한 비보(裨補) 건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풍수지리적인 형국에서 좋은 기를 받아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한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세계에서 유명세를 타는 마을이 되기까지는 선현의 배출과 지혜로움으로 가능했고 후손들이 문화적 가치를 잘 알고 원형대로 보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회마을과 함께 작은 시골마을로 정취를 풍기는 명당으로 영원토록 후손에게 대물림되기를 기대한다.

■ 중은 양동주 선생 주요약력

△ 경북 포항 출생

△ 영남대 생활과학대학 박사과정

△ 포항대학교 평생교육원 풍수지리강사

△ 대구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풍수 지리 강사

△ (사)정통풍수지리학연구학회(精通風水地理硏究學會) 학술위원

△ 좋은터생활환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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