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성기 역사·문화 간직한 대가야국 왕들의 무덤
최전성기 역사·문화 간직한 대가야국 왕들의 무덤
  • 권오항·양승복기자
  • 승인 2013년 08월 13일 22시 05분
  • 지면게재일 2013년 08월 14일 수요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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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령 지산동 고분군순장(殉葬)이란?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 지산동 44호분

△고구려, 백제, 신라와 고대문화의 한 축 이룬 대가야

우리나라의 고대사회를 흔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호남지역 일부까지를 아우르면서 우리 고대문화의 한 축을 이뤄던 가야는 삼국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다만 가야는 잊혀진 왕국, 신비의 왕국, 철의 왕국 등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야는 약 600여년 동안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신라에 통합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여 년 전에 불과하다.

지산동 30호분 발굴 모습

가야사회를 주도했던 국가는 대략 서기 400년을 전후해 전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였고, 후기에는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였다.

특히 대가야는 정치, 문화, 영역적으로 볼 때 가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순장문화와 가야금, 토기·철기문화 등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우리 고대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령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400년대 초반부터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400년대 중반부터는 합천 북부지역을 지나 거창, 함양을 거쳐 전북 남원, 임실, 장수에 까지 세력이 미치게 됐다.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박물관 모습

전성기의 대가야는 고령지역을 도읍으로 해 오늘날 경남도와 전북도, 전남도 일부 까지를 아우른 명실상부한 대 가야국이었다.

대가야는 영호남 지역을 아우르는 영역국가로 성장하였으며, 삼국에 버금가는 고대국가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대가야의 영광, 지산동고분군

고령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 위에는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주산성이 있다.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400년께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대가야의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지산동고분군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동44호와 45호분을 비롯해 그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7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해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출토된 대가야 최대의 중심고분군임을 알 수 있다.

지산동고분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191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에 의해 몇 차례 이뤄졌으나, 본격적인 학술조사로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해방 이후 1977년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우리 손에 의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지산동44호분과 45호분에 대한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순장을 확인했으며, 지산동44호분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사람이 순장된 순장 고분이다. 그리고 1978년에는 지산동32~ 35호분, 1995년에는 지산동30호분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2008년에는 지산동73~ 75호분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는데, 그 결과 73호분은 지산동고분군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최초의 대가야 왕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에는 지산동고분군의 남쪽 능선에 위치한 지산동518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뤄졌다.

이처럼 지산동고분군은 지난 30여년간 10여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됐다. 이러한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대가야는 삼국에 버금가는 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했으며, 우리 고대사를 '4국시대'로 파악하려는 인식이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

현재 지산동고분군의 고분 숫자가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관계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한 지표조사를 통해 고분의 숫자를 추정할 따름이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600여기로 추산했고, 해방이후인 1963년 사적 제79호 지정되면서 고분의 연구와 관리를 위해 일련번호를 붙여 줬다.

이후 1994년에는 대략 158기로 조사됐는데 이후 고분의 숫자를 대략 200여기로 소개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 고령군에서 전문학술기관에 의뢰해 다시 정밀조사를 실시한 결과 놀랍게도 육안으로 확인되는 봉토를 가진 고분이 대략 700여기로 조사됐다.

이 숫자는 대체로 일제강점기 때 조사한 600여기보다도 더 많은 것으로 단일 고분군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봉분 숫자로 추정된다.

또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 않는 작은 돌덧널무덤(석곽)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왕릉전시관이 건립된 부지의 경우 봉분이 없는 작은 무덤이 200여기 이상이 조사됐다. 따라서 지산동고분군에는 700여기의 봉토분과 봉분이 없는 작은 무덤을 모두 합하면 2만여기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산동고분군은 대체로 대가야시대에 조성된 고분으로,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규모는 지름 40m 이상이 1기, 30~ 40m 사이가 5기, 20~ 30m 이상이 13기, 10~ 20m 사이가 대략 100여기 정도이다.

이 중 규모가 큰 고분은 왕과 왕족일 것이고, 그 미만은 상하급의 귀족일 가능성이 높다.

지산동고분군은 대체로 서기 400년경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축조된 것이 대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160여년간 700여에 달하는 고분이 조성된 것이니, 1년에 4.4기 이상의 고분이 만들어진 셈이다. 대가야의 최고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무덤인 지산동고분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가야의 무덤은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한다.

특히 왕릉급의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 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다.

700여기가 넘는 지산동고분군의 대가야 무덤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60여년간 지속적으로 만들어 졌다.

지금까지의 조사결과 대체로 아래쪽에 있는 무덤들이 먼저 만들어졌고 차츰 능선의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서 무덤을 만들었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대가야의 왕이 힘이 점점 커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순장이란?

한 집단의 지배층 계급에 속하는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 사람 뒤를 따라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죽은 사람을 함께 묻는 장례법. 죽은 뒤에도 평상시의 삶이 재현된다는 믿음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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