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남부 일대 지배했던 천년신라의 비밀 풀어낼 열쇠
한반도 동남부 일대 지배했던 천년신라의 비밀 풀어낼 열쇠
  • 양승복·김형소기자
  • 승인 2013년 08월 20일 22시 14분
  • 지면게재일 2013년 08월 21일 수요일
  •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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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울진 봉평신라비
울진 봉평신라비 전시 모습

국보 제 242호인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는 한 농부에게 우연히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밖으로 나온 비석은 곧바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고, 비문(碑文) 해석본은 실로 놀라웠다.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천년 동안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신라시대의 풀리지 않던 역사 수수께끼들을 해결할 단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봉평신라비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불릴 정도로 역사·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울진 봉평신라비 전시관

△ 1천500여년을 거슬러 현세로 나온 봉평신라비

지난 1988년 1월 20일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118번지의 논에서는 고대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비석 하나가 발견된다.

논 주인인 주두원씨는 굴착기를 불러 객토 작업중 길쭉한 직사각형 형태의 돌덩이(길이 204㎝, 너비32~55㎝) 하나를 파낸다.

주 씨는 그저 평소 불편했던 돌덩이 하나를 빼냈다고 속 시원하게만 여기고 별생각 없이 인근 동치천에 내버렸다.

두 달여가 지난 뒤 당시 이 마을 이장이였던 권대선씨는 돌덩이의 모양이 웅장하고 특이해 정원석으로 쓰려고 자신의 집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돌덩이가 워낙 큰 탓에 쉽게 옮기기 어려웠고, 돌판에 글자가 새겨진 듯한 흔적이 발견돼 혹시나 고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울진군청으로 연락하게 된다.

연락을 받은 이규상 관광문화재계장은 혼자 현지 조사를 벌였다. 그는 돌판에 적힌 한자가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해 곧바로 부군수에게 보고 했다.

이후 경북도를 거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발굴 조사 뒤 같은 해 11월 4일 '울진 봉평 신라비'라는 공식 명칭이 붙은 국보 242호로 지정받는다.

봉평신라비는 최초 발견된 지점에서 마을 서낭당 옆으로 옮긴 후 비각을 세워 안치하고 있다.

비는 4각형 변성화강암으로 재질은 좋지 않으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있었던 탓에 형태의 보존성은 높은 편이다.

비문은 10행에 399자의 고졸한 해서(정자체)에 가까운 이체자 형태를 띄고 있다.

해석된 문자들을 풀이하면 어떤 내용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첫 머리글인 갑진년 정월 15일/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男彌只)/ 노인법(奴人法) 등의 글자 풀이를 종합해봤다.

서기 524년(갑진년, 법흥왕 11) 정월 15일, 모즉지 매금왕(곧 법흥왕)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 등 신료 14명이 모여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거벌모라(현 울진 중심지) 지역에서 성(成)에 불을 지르는 등 신라에 항쟁하는 사건에 대해 '노인법(신라에 복속된 집단 예속민을 성문법으로 다스리는 법령)'을 적용시켜 과오를 범한 자들에게 곤장을 치는 형벌을 내렸다.

즉 일종의 반란 사태를 제압하고 형벌을 준 뒤 재발방지를 위해 얼룩소(斑牛·칡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을 기록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봉평신라비의 존재는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의 이해를 돕는다.

이 비석이 세워지던 시대의 서라벌 중앙권력과 거벌모라 지방세력의 정치지리학적 관계는 흥미롭다.

비의 형태는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한 고구려비 모양으로 크기가 웅장하지만, 재질과 글자는 신라계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울진이 신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이를 못마땅히 여긴 북방계열의 민족성이 상당했다고 보고 있다.

거벌모라 주민들의 항쟁사건에 대한 서라벌 중앙권력의 대응이 곧 '신라비'의 내용이라면 이 지역에는 능동적인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반증한다.

남옥저-동예-맥족의 후예들은 스스로 고구려인임을 자처했고, 신라의 '노인법'으로 다스려지는 예속민의 처지가 되었을지라도 자치적인 역량을 확보코자 했던 것으로 살필 수 있다.

훗날 울진 사람들은 고구려의 용맹함과 강인한 기백을 이어받은 것을 자부심으로 내세울 수도 있겠다.

△ 봉평 신라비가 가진 사실성과 역사 추리

거벌모라 난을 일으켰던 인물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가정이다.

이 역사적 가정은 일본 왕조였던 '하타족'이 울진에서 건너갔다는 설이다. 일본의 도래 성씨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성은 하타 곧 진(秦)씨다.

하타의 어원은 바다를 뜻하는 파타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동안 일본학계에서는 진 씨가 오래전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신라계 씨족으로 생각해왔다.

이같은 주장은 하나의 가설로 이어져 오다가 봉평신라비의 발견과 함께 힘을 얻고 있다.

봉평 신라비 비문 7행에는 파단(波旦·)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고구려식 지명으로 지금의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골장 마을' 일대를 일컫는다.

골장 마을은 바닷가인 동시에 당시 진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일본의 하타족이 울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인이였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타'씨는 일본내 기반이 없는 신라계 호족에 불과했지만 교토에 양잠기술을 전해줬고, 인근 가도노 대제방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5세 무렵엔 가츠라강에 제방을 쌓아 이 일대를 농경지로 개간하기도 했다.

이같은 내용은 교토 가이코노 야시로 신사 기록물로 확인되며, 이후 하타씨는 거대한 부를 축적해 일본 황실과 혼인을 맺고 세력을 확장했다.

결국 한반도에서 가져온 독특한 기술과 문명으로 고대 일본에 많은 도움을 줘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을 세운 셈이다.

이처럼 봉평 신라비는 역사지리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해의 고대아시아족 이동루트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조사와 함께 심도 깊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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