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청도읍성

수련이 만발한 청도읍성 전경.

대구에서 가창을 거쳐 팔조령터널을 지나 10여분 정도 지나면 청도군 화양읍 소재지가 보인다.

청도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화양읍은 옛 청도의 중심지였으며, 읍성을 중심으로 석빙고, 도주관, 동헌, 척화비, 향교등 지정문화재가 모여 있으며 다른지역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화양읍소재지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동상리, 서상리, 동천리에 위치해 있다. 성벽의 상태가 양호한 구간에 대해 지난 1995년 1월 14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도주관(道州館)도주관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拜禮)를 하였으며, 양쪽 동·서헌에 접객시설을 갖춰 이 곳을 들리는 관원들이 머물수 있도록 했다. 도주관은 조선초기부터 있었으나, 목재가 썩어 내리는 등 노후하고 누추해 삼족당 김대유(金大有)가 조선 중종 36년(1541년) 태수 안태고(安太古)에게 재건해 줄 것을 청원하고, 소요당 박하담(朴河淡)이 설계를 완성하자 관찰사 이청(李淸)의 도움으로 착수하게 됐다. 목재는 운문에서 벌채해 물길을 따라 옮겨 중종 38년(1543년) 중창했다. 이는 풍수군수겸 춘추관 편수관이었던 상산 주세붕(周世鵬)이 쓴 중수기문에 기록돼 있다.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4칸 맞배지붕의 익공(翼工)집이며, 객사는 정면 6칸, 측면 4칸이다.

고문헌에 따르면 고려때 군수 최안을이 객관(客館) 동쪽에 건립한 청덕루(淸德樓)가 이 고장의 자랑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말엽에 객관과 함께 누대(樓臺)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등의 조선 초기 문헌에는 석성(石城)의 읍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읍성은 동래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대로상에 위치하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동헌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중심 건물로 관찰사·병사·수사(水使)·수령(守令)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 또는 서헌(西軒)과 구분돼 보통 그 동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됐다. 청도 동헌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해 이전함에 따라 관아건물로의 용도는 폐기되고 이후 동헌 건물만 남아 학교 교실로 활용됐다. 원래 영조 13년(1737년) 창건당시에는 현재 화양초등학교에 있었는데 1955년 12월 22일 내아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조선시대 청도군 객사 도주관(사진 위)과 지방 관서에서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 건물 동헌.

이렇듯 청도읍성은 오랜세월동안 청도지역을 비롯해 한양대로를 방어하는 주요거점에 군사적, 정치·행정적인 기능을 담당해 온 것이다. 그리고 청도읍성의 역할과 중요성은 비단 조선시대뿐만 아니고 고려시대 이전부터 인식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도읍성은 남산 북쪽의 남고북저한 산록 선상지에 위치한다. 현재 읍성 북쪽으로는 청도천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는 넓은 충적지가 형성돼 있어 이 지역 생활경제의 기반이 되고 있다.

현재 읍성내로는 시가지가 조성돼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읍성의 공간구성을 기반으로 각종 관아건물과 시설물들이 성 안팎으로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일본인들이 성내의 도로 개통을 이유로 성문을 비롯해 그 주변의 성벽을 철거하는 훼손을 자행하기도 했다. 특히 동·서로 개설시에 읍성 중심시설인 객사를 비롯해 성내 일부 관아건물이 훼손되기도 했다.

청도읍성은 성곽의 형태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성벽이 타 지역과 비교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읍성 안팎으로 석빙고, 객사, 동헌, 향교, 석빙고, 성내지 등 당시 관아건물과 공공설물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음은 보기 드문 예이다.

또 읍성과 관련된 각종 고문헌 및 고지도 자료도 다수 남아 있어 읍성을 파악하는데 큰 많은 도움이 됐다.

이에 청도읍성의 역사적·문화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훼손되고 있는 읍성의 성곽과 훼손된 관아를 비롯한 공공시설물 등의 유적에 대한 현황을 정확히 분석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청도군은 청도읍성에 대한 고문헌 및 현장조사를 통한 학술적인 재조명을 통해 역사문화도시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전통문화의 가치를 계승발전시키는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1차적으로 지난 2003년 청도읍성 정밀실측조사를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의뢰해 실측조사를 실시했다. 1차 정밀실측 조사에서는 읍성의 현황과 규모, 성곽의 구조 및 축조방법 등을 현장조사해 그 양상을 밝혀내는데 있었고, 성곽의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구간을 선정해 평면·입면·단면도를 실측조사해 도면화하고, 축조수법 및 단면구조를 파악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도읍성은 과거 지방도시의 중심지에 현 도시의 원형을 추적할 수 있는 성곽을 비롯해 각종 공공시설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어서 현대산업사회의 급속한 도시구조의 변화속에 방치 또는 장애물로 인식돼 그동안 학술적, 역사적, 문화적 재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태였다.

청도군은 1단계사업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130억원을 투입해 성곽보수, 치성, 옹성, 북문루등을 복원했으며, 2단계사업으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160억원을 투입해 성곽보수, 성내지 정비, 형옥정비 등을 실시해 연차적으로 복원정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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