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래 구름, 그 아래 기암괴석…대자연 앞에 감탄사가 절로
발아래 구름, 그 아래 기암괴석…대자연 앞에 감탄사가 절로
  • 양승복·박태정기자
  • 승인 2013년 09월 10일 21시 44분
  • 지면게재일 2013년 09월 11일 수요일
  •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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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미 금오산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해 예로부터 영남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금오산의 전경.

영남팔경 중 하나로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해

중국의 오악 중 하나인

숭산과 견주어도 손색없어

남숭산으로 불리기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북적

채미정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 금오산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금오산은 영남팔경의 한군데로 면적이 37.65㎢이며 정상의 높이가 976m로 기암괴석과 수림, 계곡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연중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있다.

채미정과 보물 제 490호인 마애보살입상, 금오산성 등의 유적과 대혜폭포, 도선굴, 유원시설인 금오랜드, 금오지, 야영장, 자연체험이 가능한 경북자연환경연수원 등이 있다.

한반도의 진산은 우리의 영산인 백두산이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이 이뤄졌고, 다시 소백산이 되고, 소백산은 죽령과 새재 그리고 추풍령을 지나 무주의 덕유산을 만들어 남으로 힘차게 내치다가 한 지맥이 동북으로 거슬러 김천 대덕의 수도산이 되더니 여기서 세 갈래로 나눠져 하나는 동남으로 내치어 합천의 가야산이 됐다. 또 한 줄기는 서북으로 뻗어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경계점에 솟아 삼도봉이 되고, 나머지 한 줄기는 북으로 내치다가 땅속으로 스미듯이 하면서 간직했던 기백을 김천, 칠곡, 구미의 경계점에서 우뚝 솟은 금오산이다.

금오산성

서쪽으로 김천의 남면, 동남으로 칠곡의 북삼을 경계로 하며 면적이 무려 37.9㎢나 되며, 산세가 수려하고 준기해 하늘처럼 높게 솟아 사면이 가파르며 여름에는 한기가 차고 가을에는 단풍의 명소로 일명 소금강이라 불리며 예로부터 영남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다. 고려 때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이라 불렀으며,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다.

금오산의 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금오란 명칭은 옛날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는 새를 따라왔더니 이 산에 이르러 자취를 감췄는데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왔다고 해 금오산이 됐다고 하고,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금오(金烏)는 금까마귀로 옛날부터 해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삼족조, 三足鳥)로 태양 자체 또는 해의 정기를 뜻하는 동물이었다. 달에 산다는 옥토끼가 달의 서기며 달 자체를 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외에도 옛날에 천지가 개벽해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산이 거무(거미)만큼 남았다고 해서 금오산이 됐다거나 천지개벽 때 전부 바다가 됐는데 산봉우리가 까마귀 머리만큼 남아서 금오산이 됐다는 전설도 있다.

금오산 능선을 유심히 보면 '王'자처럼 생긴 것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거인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거인산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와불산이라고도 한다. 거인의 옆모습에서 그 눈(현월봉과 약사봉 사이)이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어서 일찍이 무학대사가 "명산이로고! 거인이 나겠구먼"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그 산자락을 드리운 곳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이 붓끝 같아 필봉이라 하며 선산에 문사들이 많이 배출됐고, 인동 방면에서 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귀봉이라 하며 고관이 많이 배출됐다. 개령 방면에서 보면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노려보는 모습 같다 해서 적봉이라 하며 큰 도적이 많이 나왔다고 엉뚱하게 풀이되기도 하고, 김천 방면에서 보면 노적가리 같다 해서 노적봉이라 하며 부잣집이 많았다 한다.

그리고 성주 방면에서 보면 바람난 여인의 산발한 모습 같다 해서 음봉이라고 하며 관비가 많이 났고, 성주 기생이 이름이 난 것도 이 산세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금오산성

금오산성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이중으로 두른 석축산성으로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 때 보수하여 선산, 인동, 개령, 성주 등의 백성들이 이 성에 들어와 지키게 하였다.

1410년(태종 10)에 국가적 사업으로 크게 고쳐 쌓았으나 외적의 침입이 없자 차츰 폐허가 됐다. 그 후 임진왜란·병자호란 때와 1868년(고종 5)에 계속해서 고쳐 쌓았다.

조선 후기에는 선산도호부사가 금오산성 수성장을 겸했고, 개령, 김산, 지례 등의 고을이 군창을 이곳에 뒀다. 외성을 쌓아 이중으로 만든 것도 이 때의 일이었는데 지금은 내성과 외성의 문터와 암문의 형세가 남아 있다.

성안에는 폭포가 있는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각종 건물이 있었으나 모두 폐허가 됐다. 내성창, 대혜창 등의 창고와 진남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성 안에는 고종 때 대원군의 지시로 세운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金烏山城重修訟功碑)'가 있는데 이것은 산성과 건물을 중수한 후 세운 기념비로 백성의 생업 종사 및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채미정 (採薇亭)

명승 제 55호로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영조 44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전면 보수했다.

길재는 고려시대인 1353년(공민왕 2)에 출생해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善山)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그가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후세 사람들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컬어 높은 절의와 고매한 학덕을 추모했다.

채미정의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왕조에 충성을 한 고사에 비유해 명명한 것이다.

계류에 걸친 다리를 건너 흥기문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가 있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 있는 경모각과 유허비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도선굴과 대혈사

금오산 북쪽 중턱에 자리한 도선굴(道詵窟)은 일명 대혈(大穴)이라고 불리는데, 신라 말에 도선대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해서 도선굴이 됐다.

최현의 '일선지'에는 대혈사는 금오산 북록에 있으며 임진왜란 후에 중건했고, 경내에 있는 함벽루는 이 절의 남루로서 계석을 내려다보는데, 야은 길재 선생이 항상 누 위에 거처하고 또 금산으로부터 대나무를 이곳에 옮겨 손수 심었으며, 고을 사람들이 잘라가는 것을 금하니 지금 무성하여 야은죽(冶隱竹)이라 한다고 했다.

야은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야은 선생이 이 굴속에서 수심 정좌(修心靜坐)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선생이 불 피우던 연기는 긴 굴을 통해 낙동강 부근에서 피어올랐다고 한다. 당시에 태조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선생을 찾아가되 당장 목을 내놓거든 그냥 두고, 두려워 몸을 숨기거든 목을 베어오라고 일렀다.

이에 명을 받은 군사들이 몰려와 목을 내어놓으라 하니 야은 선생은 태연하게 굴 앞에 나오므로 군사들은 그 높은 덕에 감복하여 모두 땅에 엎드려 사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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