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었지만 재위 7개월만에 세상과 이별 왕위쟁탈전 허무함 비웃듯 왕릉가에 이름모를 풀꽃만 무성

경주시 동방동 660에 위치한 신라 제45대 신무왕릉 전경.

7번 국도를 따라 사천왕사터에서 울산 방향으로 약 1.5㎞ 가면 길 왼쪽으로 신무왕릉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따라 조금 가다가 동방동 마을로 들어서서 약 300m 정도 올라가면 신무왕릉이 있다.

마치 고향 같은 마을길을 돌아가자 작은 문이 달린 담장이 보인다. 제45대 신무왕릉이다. 넓지는 않지만 아담하게 가꾸어진 터다. 양쪽으로는 대나무가, 뒤편은 소나무 숲이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묘지 터로는 명당이 아니라고 한다. 왜일까? 남편이 풍수지리를 안다며 설명을 한다. 원래 명당이란 뒤에는 산이 병풍이 되어주고 앞은 탁 터여야 하며 물이 있어야 한단다. 소나무 숲 뒤로는 바로 하늘이 보인다.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다. 그러면 뒤에 산이 없어서 명당이 아닌가? 어설퍼 보이는 설명 같지만 일리는 있어 보인다.

동방 와요지군.

봉분도 자그마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표지석이 나란히 놓여 있을 뿐 별다른 장식물은 없다. 기울어가는 신라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신무왕은 희강왕과 왕위다툼에서 죽임을 당한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다. 바로 진지왕릉과 가까운 곳에 묻힌 문성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는 것 많은 남편이 문성왕릉에서도 한번 나왔던 장보고에 얽힌 이야기를 한다.

"신무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장보고를 찾아가 원수인 민애왕을 제거해 주면 딸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했지. 장보고는 왕의 장인이 된다는 말에 솔깃하여 군사를 일으켜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어. 아들 문성왕은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데려와 왕비로 삼으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했고 화가 난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키려 했어. 그 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이 장보고를 찾아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몸을 의지하러 왔다고 속이고 비정하게 죽였다는 거야."

신무왕릉 둘레돌.

신무왕이 군사력을 가진 장보고와 인연을 맺었다면 왕조를 지키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하기야 골품제도가 뿌리박힌 신라사회에서 낮은 신분의 딸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겠지. 그래서 개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안내판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신무왕릉 입구.

신라 신무왕릉(新羅 神武王陵)//사적 제185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660

이 능은 신라 제45대 신무왕(재위 839, 김우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3m, 지름 16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다. 이처럼 자연호석을 사용한 양식과 풍수지리상의 입지가 아닌 점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보다 먼저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무왕은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張保皐)의 힘을 빌어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病)으로 죽었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의하면 "왕이 돌아가시자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었지만 꿈에 나타난 이홍에게 화살을 맞았고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종기가 생겨서 재위 7개월 만에 세상과 이별을 한 신무왕은 처절한 왕위쟁탈전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남편은 신무왕릉을 둘러보고는 무덤의 주인이 신무왕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며 왕릉 양식의 변천과정을 이야기 한다.

"신라시조인 박혁거세부터 지증왕까지는 널무덤 또는 돌무지덧널무덤을 사용하였지. 널무덤은 땅을 파고 나무로 만든 관을 넣고 봉분을 크게 한 거야. 우리가 가본 천마총 기억나지?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문화유산해설사가 설명했었잖아. 이 시기에는 경주의 평지에 왕릉이 만들어졌고 왕릉 주변에는 흙이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된 둘레돌을 해 놓았어."

"다음에는 어떤 무덤이야?"

"법흥왕부터 경덕왕까지의 왕릉은 굴방식돌방무덤을 사용하였어. 석재를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돌로 천장을 만들었지. 남쪽입구에 통로를 만들고 석실 안에는 시신을 놓는 시상대를 만들어 그 위에 돌로 만든 문을 닫고 복도를 포함해서 모두 다시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들었어. 굴방식돌방무덤은 가족이나 배우자가 죽으면 다시 무덤 입구를 열고 추가로 매장했다고 해. 왕권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굳이 크게 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불국사역 앞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에 가봤잖아. 그게 굴방식돌방무덤이었어."

"신무왕은 신라 하대왕인데 어떤 양식이었을까?

"경덕왕 이후의 무덤양식은 굴방식돌방무덤 그대로지만 봉분이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놓았던 자연석 대신에 돌을 반뜻하게 다듬어 판석을 세우고 그곳에다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여 놓았어. 그 후 무덤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돌사자도 세우고,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을 갖추어 놓았지. 이 시기에는 경주 주변보다는 더 멀리 떨어진 외곽에 왕릉을 만들었어. 대표적인 왕릉은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이야. 신무왕은 경덕왕 이후의 왕이니까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었을 것이고 형태로 볼 때 현재 진덕여왕릉으로 전해지는 왕릉을 신무왕릉으로 보고 있는 학자도 있다고 해. 지금의 신무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고, 봉분의 바닥에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초기의 무덤양식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거지."

"우와, 대단하다."

간략한 설명으로 무덤양식이 내 머릿속에 잘 정리 된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덤이 정확한 증거가 없어 추정으로 남는 현실이 안타깝다.

마을을 내려오면서 경주 동방 와요지군 이정표가 있어 들렀다. 요지란 도자기, 그릇, 기와들을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경주 동방 와요지군(慶州 東方 瓦窯址群)//사적 제263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 343-4

이 가마터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조사한 9기의 기와 가마터이다. 그 중 1기를 발굴한 결과 가마의 전체길이는 10.5m, 너비는 1,72m로서 구릉 경사면을 이용하여 구축된 지하식 굴가마(등요)로 밝혀졌다. 연소실의 천정부와 축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도자기를 빚던 곳과 굽던 방 사이에는 높은 벽이 있다.

출토된 기와편 중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한 새 깃털모양무늬와 연꽃무늬 장식기와 그리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가마 바닥에서 출토된 '건륭(乾隆)'이라 새겨진 암막새는 가마사용의 마지막 단계의 것으로 간주되어 이곳 기와 가마의 조업시기를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로 추정하게 되었다.

이정표, 비석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넓은 잔디로 뒤덮인 터만 남아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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