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위해 목숨 바친 포은 정몽주 선생 충효정신 서린 곳
나라위해 목숨 바친 포은 정몽주 선생 충효정신 서린 곳
  • 고재석·양승복기자
  • 승인 2013년 10월 01일 21시 00분
  • 지면게재일 2013년 10월 02일 수요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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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천 임고서원
▲ 포은 정몽주 영정사진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丹心歌)

▲ 임고서원 흥문당

조선 명종 8년 창건…1980년 성역화사업 경북도 기념물 제62호

태종 이방원에 피살 역사적 현장 개성 선죽교 본떠 '널다리' 설치

빈민 구제·법질서 확립·성리학 전파 등 교육 진흥에도 앞장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에 위치한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 임고서원 선죽교

조선 명종 8년(1533) 노수, 김응생, 정윤량, 정거 등이 사람들을 창솔해 부래산에 창건을 시작해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했으며,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해 재사액 받았으며, 인조 21년 (1643)에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배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을 건립해 영정을 봉안했다.

지난 1965년 복원해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 황보인을 다시 배향했다.

묘우는 문충사, 내삼문은 유정문, 강당은 흥문당, 동협은 수성재, 서재는 함육재, 문루는 영광루이며, 경내 심진각과 전사청 및 경내에는 포은 선생 신도비·단심가비, 백로가비 등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유사실은 유사가 집무를 보는 곳이고, 포사는 향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며, 고사는 고직(庫直)이 거처하는 곳이다.

유물로는 정몽주의 영정 3폭과 '포은문집(圃隱文集)' 목판 113판, '지봉유설( 芝峰類說)' 목판 71판, '포은집'·'어사성리군서(御賜性理群書') 11권 외에 200여권의 서적이 소장돼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돼 있으며, 서원내의 은행나무는 경상북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돼 있다.

△임고서원 은행나무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높이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에 이르는 나이가 약 500년의 은행나무로서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노거수로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약 22m, 남북방향으로 약 21m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었을 당시 그 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임고서원을 이곳에 다시 지으며 옮겨 심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조옹대

임고서원 동북쪽에는 선원과 대환 뒤를 애워싸 산맥을 이뤄 달려온 구릉 끝에 반석이 있는데 옛날 포은선생께서 낚시를 하시면서 노닐던 곳인데 이 반석을 '조옹대'라 명명해 많은 선비들이 지은 시가 남아 있다.

△임고서원 선죽교

임고서원 앞에 만든 선죽교는 북한 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본떠 만들었다.

선죽교는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로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송도(지금의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국보급문화제 제36호로 지정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변경됐다.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 (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했다. 선죽교는 1392년(조선 태조 즉위년) 정몽주가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의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선지교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해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은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해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했다.

다리 옆에 비각 안에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서 있다. 또 선죽교 서쪽으로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과 표충비가 있다.

△포은정몽주유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인 포은정몽주유허비(圃隱鄭夢周遺墟碑). 정몽주가 1355년(공민왕 5)에 부친상을 당해 여묘 삼년(廬墓三年 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삼년간 지킴)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365년 모친상을 당해 역시 여묘 삼년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다했으므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돼 그의 출생지인 우향리에 공양왕 원년(1389) 당시 영천군수인 정유가 '孝子里(효자리)'라 새긴 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성종 18년(1487)에 경상감사 손순효가 순력(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함) 중 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던 밤에 현몽(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이 있어, 다음날 촌로와 더불어 땅 속에 묻혀져 있던 비석을 찾아내어 다시 세우고 비각을 지어 보호했다. 그후 선조 40년(1607) 군수 황여일이 비각을 중수했다.

△포은 정몽주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이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고 '신율(新律)'을 간행,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정몽주의 초명은 몽란(夢蘭)과 몽룡(夢龍)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에 놀라 깨어나 그를 낳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또 정몽주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낮에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을 꾸다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배나무에 그가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몽룡이라고 고쳤으며, 그가 성인이 된 뒤 다시 몽주로 고쳤다.

정몽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남달랐고,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일곱 개나 있었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함으로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존숭받는 학자이다.

고려 말 국운이 기울어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한 이성계, 정도전 등의 개국세력을 상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인물로 후세에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문집에는 '포은집'이 있고, 충절의 시조 '단심가'와 많은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부모님의 여막을 지켜 효행을 실천했는데 이때 행한 삼년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행한 것으로 이후 상례의 기준이 됐다.

이러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 학문, 사상, 효행을 기리기 위해 임고서원이 세워졌으며, 그 가치가 인정돼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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