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효공왕릉과 경애왕릉

▲신라 제52대 왕 효공왕릉

후백제·후고구려 침략에 나라 어지러워

제52대 효공왕, 영토 빼앗기는 수모당해

포석정 연회 중 견훤 습격받은 경애왕

비참한 생의 마감 신라 멸망과 닮은 듯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능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제52대 효공왕(孝恭王)의 능으로 향했다. 가을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고 햇볕 또한 따사롭다. 왜 말이 살이 찌고 책에 손이 가는 계절인지 알 것 같다.

▲ 효공왕릉에 둘레돌이 드문드문 드러나있다.

효공왕릉 이정표를 따라 마을에 들어서서 골목길로 한두 집을 지나니 바로 널찍한 터에 조금 큰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견훤과 궁예에게 땅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 효공왕의 능이다. 앞에는 벌써 황금빛이 되어가는 벼논이 펼쳐져 있고, 뒤에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안정되어 보인다. 남편이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안내판의3 내용을 읽는다.

▲ 견훤의 습격을 받아 자살을 택한 경애왕의 릉

신라 효공왕릉(新羅 孝恭王陵)

사적 제183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14

이 능은 신라 제52대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3m, 지름 22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은 타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효공왕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뒤를 이어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절한 남편은 부연설명도 잊지 않는다.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로 태어나 진성여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야. 신라는 진성여왕 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 갔잖아.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왕위에 오른 효공왕에 이르러서 더욱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어졌지. 마침내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켰어.

효공왕이 진성여왕의 실정을 거울삼아 정신을 차렸다면 신라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지난 역사의 물줄기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난날의 허물을 교훈으로 새기고 새로 쓰는 역사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능을 덮고 있는 잔디는 가을빛을 닮아간다. 마을 안에 있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무척 외로워 보이는 능이다. 봉분 둘레에 둘레돌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왕릉이지만 그 위로 가을 햇볕만은 풍성하게 내리쬐고 있다.

경주에 있는 마지막 왕릉인 제55대 경애왕릉(景哀王陵)으로 향했다. 제53대 신덕왕릉(神德王릉)과 제54대 경명왕릉(景明王릉)은 베리삼릉 때에 소개하였다. 경애왕릉은 베리삼릉 바로 옆에 있어서 다시 찾았다. 베리삼릉에서 건너편을 내려다보니 어렴풋이 경애왕릉이 보인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 특이한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상선암으로 가는 길은 신라의 미소를 띤 수막새 모양으로, 경애왕릉은 사천왕의 얼굴을 새긴 기왓장 모양으로 안내한다. 경애왕릉은 100m거리에 있다고 한다.

소나무 사이로 왕릉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후대에 놓은 것 같지만 능 앞에는 상석이 있고 경애왕릉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장식 없이 봉분만 높이 솟아있는 능이다.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비운의 왕이어서 그런지 왕릉 주변은 쓸쓸함마저 감돌고 있다. 안내판은 경애왕릉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제222호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동 산73-1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모신 곳이다. 밑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南山)의 북서쪽 구릉의 끝이자 인천(麟川;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박씨 왕을 윗대부터 순서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혁거세 거서간(오릉), 남해 차차웅(오릉), 유리 이사금(오릉), 파사이사금(오릉), 지마 이사금(지마왕릉), 일성 이사금(일성왕릉), 아달라 이사금(삼릉), 신덕왕(삼릉), 경명왕(삼릉), 경애왕(경애왕릉). 박씨 왕은 신라 초와 말에 모두 10명이 있었다. 경애왕은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위응이다. 4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다가 갑자기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다른 나라의 왕이 수도까지 쳐들어왔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술잔이나 띄우고 있었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질적으로 경애왕이 신라의 마지막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능 앞에 서니 권력도 영화도 한 순간의 꿈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권력을 탐했을까? 아무리 어렵게 얻어도 그저 누리려는 마음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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