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나옹선사가 창건한 고찰…소실·폐찰 아픔 겪어
고려말 나옹선사가 창건한 고찰…소실·폐찰 아픔 겪어
  • 최길동·양승복기자
  • 승인 2013년 10월 15일 21시 01분
  • 지면게재일 2013년 10월 16일 수요일
  •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북의 문화재 재발경- (10) 영덕 운서산 장육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장육사(莊陸寺)는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운서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 고찰이다. 전하는 말에 고려 공민왕(1351∼1374) 때 창수면 가산리 태생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세종 때에 운서산에 산불이 크게 나서 사찰이 소실돼 후에 중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울진에서 영해로 넘어오던 왜적들에 의해 폐찰됐던 것을 1900년에 다시 중수했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관음전, 대웅전 전면의 2층 누각으로 구성된 흥원루, 화운각, 산령각, 홍련암, 요사채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웅전

현재 장육사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993호), 대웅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영산회상도 후불탱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3호), 지장보살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4호)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보존돼 있다.

△건칠관음보살좌상

영덕 운서산 장육사 전경

건칠관음보살좌상(乾漆觀音菩薩坐像)은 장육사 관음전의 주존(主尊)으로 봉안돼 있으며 높이가 86.7cm이다. 복장발원문에 따르면 조선 태조 4년(1395)에 영해부사 백진과 주민들의 시주로 조성됐고, 태종 7년(1407)에 개금(改金)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개금기에 의하면 위장사(葦長寺) 선당(禪堂) 관음보살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영해도호부 용두산 우물 옆에 있었다는 위장사에 안치된 불상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건칠불(乾漆佛)의 표면은 삼베 위에 칠을 입히는 공정을 반복해 일정한 형태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보살상은 삼베 대신에 종이를 이용했으며 전체적으로 비례가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의 보관(寶冠)은 나무로 별도로 만들어 올렸다. 신체의 굴곡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으나 목걸이, 옷깃과 소매, 배, 다리까지 화려한 영락(瓔珞)을 둬 장식성을 강조한 수법은 조선조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고려에서 조선시대 조각으로 연결해 주는 조각사적 의미가 매우 높은 불상이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창건한 장육사의 주불전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상부가구는 7량으로 구성된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포작을 구성하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며, 내부는 공간 활용을 위해 우물마루를 깐 통칸(通間)으로 처리하고 불단과 불상을 안치하고 불단 위에는 보개천정을 뒀다.

가구나 보아지의 형상, 천장 등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고식 수법을 보이고 있고, 화려한 금단청, 빗천장의 주악비천상, 좌우 벽체의 보살상 벽화는 독특한 필법으로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영산회상도는 영취산에서 석가여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한 모임을 묘사한 불화이며, 대웅전 삼존불상 뒤편에 설치된 후불탱화이다.

강조된 본존을 중심으로 많은 권속이 등장한 군도형식이며, 각 상의 균형 잡힌 상태, 광배를 장식하고 있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보상화 문양, 채색 기법 등에서 18세기 중엽 불화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며 불상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지장보살도

장육사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는 장육사 대웅전(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본존불 우측 내벽에 걸려져 있는 탱화다.

지장보살은 인도의 토신(土神) 에서 유래한 보살이고, 땅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이처럼 지장보살도 모든 죽은 사람들의 죄를 구제하고, 지옥에 떨어져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안락한 정토나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이다.

중앙의 주존인 지장보살을 비구(比丘) 형상으로 삭발을 하고 있고, 손에 지물(持物)로는 석장(錫杖)과 투명한 보주(寶珠)를 지니고, 천의 대신 가사를 입고 있으며 결가부좌하고 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명부시왕과 판관, 녹사 등의 권속을 표현했다. 상단에는 이부동자와 보살을 묘사하고 있다.

△나옹선사(懶翁禪師)

선각(禪覺) 나옹선사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어릴 때 이름은 원혜(元惠)이고, 속성(俗姓)은 아(牙)씨이다. 부친은 선관서령(膳官署令)을 한 아서구(牙瑞具)이며, 모친은 영산군(창녕) 사람인 정씨 이다.

선사는 충숙왕 7년(1320) 1월 15일(음력)에 오늘의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출생했다. 일설에는 창수면 가산리 까치소에서 출생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나옹은 그의 법호이며, 선각은 공민왕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선사는 스무살이 가까운 어느날 다정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과 사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산천을 주유하며 수행하다 현재의 문경시에 소재하고 있는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로 가서 출가했다.

이후 선사는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용맹정진을 하다가 충목왕 3년(1347) 원나라로 구도의 유학을 떠났다.

원나라에서 선명을 떨치고 있던 인도승(印度僧) 지공화상을 만나 불법의 새로운 시야를 눈뜨게 됐으며, 10여년간 원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이름난 선사들과 선문답을 나누면서 거침없는 선지식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원나라에서 고려인으로서, 영해인으로서 당당하게 선풍(禪風)을 날렸다.

공민왕 7년(1358)에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전국 각처에 불법을 펼치려고 주유했으며, 공민왕 19년(1370)에는 선교 양종의 신자 및 승려들을 모아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해 성황리에 마쳤다.

이듬해 공민왕으로부터 왕사대조계종사선교도청섭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中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라는 벼슬을 받았다.

이후 송광사와 신광사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양주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일으키는 등 불법의 중흥에 진력했다.

우왕 2년(1376) 5월 15일에 여주 신륵사에서 조용히 열반하니, 구도를 위해 출가한지 37년 되는 해였다.

나옹화상의 가르침은 조선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를 통해 개국의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 졌으며, 나옹화상이 행하던 불교의 의식과 선지식은 오늘날의 유명사찰에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지공, 무학과 더불어 삼대화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나옹화상은 어려운 불법을 뛰어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해 중생의 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가 읊은 게송은 '나옹집'에 300여 수가 실려있어 후대의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주고 있다.

최길동·양승복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