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 삼정 바로잡아 선정 베푼 목민관의 덕 기려 세운 비
조선 말 삼정 바로잡아 선정 베푼 목민관의 덕 기려 세운 비
  • 황진호·양승복기자
  • 승인 2013년 10월 22일 21시 51분
  • 지면게재일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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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문경새재 김수근 타루비

철종 5년때 안동부사 지낸 인물

호구 정리·징병제도 바로잡아

안동백성들 새재에 공덕비 세워

문경서 보기 힘든 초석 규모

당시 위세 대단함 알 수 있어

세월 뛰어넘는 의미'고스란히'

요즘 문경새재가 대세다. 얼마전 한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은 국내 관광지중 1위를 차지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요즘 건강에 대한 화두와 힐링에 대한 갈망이 문경새재를 자연스럽게 원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문경새재에는 다양한 유적과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문경새재길은 명승 32호로 지정돼 있고, 문경새재 1,2,3관문은 사적 147호로 지정돼 있으며, 문경새재 전체가 경상북도기념물로 각각 지정돼 있다.

그리고 국내 유일의 한글비석인 '산불됴심' 비석이 문경새재에 있어 역사적 의미 또한 교훈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1관문 뒤편 한 곳에 송덕비가 모여진 곳이 있다. 이 곳에는 관찰사, 순찰사, 현감 등 이 곳을 거쳐 간 많은 목민관의 송덕비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

또 점촌북초등학교 앞에는 과거 유곡역과 관련된 찰방과 관원 그리고 관찰사들의 송덕비가 한 곳에 세워져 있다.

특히 새재에는 비석형태 외에 마애비 형태로 남아 있는 송덕비로 10여 곳 이상이 된다. 이는 가은과 산양 등을 합치면 매우 많은 숫자가 아닌가 한다.

사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실제로 송덕과 선정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많은 비석 중 얼마나 백성들의 땀과 눈물을 삼켜버린 것이 많을까?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조선후기 삼정이 문란해 지면서 신임 관리를 맞을 때는 쇄마전(刷馬錢)이라 해 관에서 주는 노잣돈 말고도 백성들이 따로 거둬 바치게 하고, 떠날 때는 입비전(立碑錢)이라 해 공덕비를 세우는데 돈을 모았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컸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문경 땅에 이러한 비석이 많은 연유가 길목인 이유도 한 몫을 차지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비석이 문경새재 교귀정 뒤편에 있는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라 할 수 있다.

철종 5년인 1855년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내려와 선정을 베푼 것을 기려 세운 이 공덕비는 유기목(1802~?)이 짓고 김진형(1801~1865)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국내에는 흔치 않은 명칭인 타루비(墮淚碑)란 중국 진(晋)나라 때 양양지방 사람들이 양고의 선정을 잊지 못해 그의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공덕비 뒷면에는 남선·임동·재산 등 안동부 소속 38방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안동부에서 기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있은 지 16년이 지난 때이고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해이다.

김수근 타루비는 1관문과 2관문 중간사이에 있는 교구정에서 2관문 쪽으로 약 2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몇 년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교귀정 정비공사를 하면서 주변이 더 깨끗하게 정리가 됐다.

비석은 원래 한 칸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비각은 없어지고 주춧돌 4개와 주춧돌을 연결하는 장대석만 남아 있다.

비는 비신, 개석, 대좌로 구성돼 있으며 비신은 오석, 개석과 대좌는 화강암이다.

△안동부사의 비, 왜 문경새재에 세웠나

문경새재에 세워진 송덕비는 대체적으로 문경현감 또는 경상도 관찰사의 것이 대부분인데 상주목사 이익저(李益著)불망비와 안동부사를 지낸 김수근 타루비는 이지역과 무관된 인물들의 비석이다.

김수근 타루비 내용은 김수근이 1839년 안동부사를 하면서 조선 말기 삼정(三政)이 문란 한 것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흩어져 살지 않게 했고, 아이와 노인의 이름이 중복된 호구를 정리해 징병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이 아들 딸 낳고 잘 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의 백성들이 일찍이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고 했으나 본부에서는 퇴계 선생의 큰 가르침을 어길 수 없다는 교훈에 따라 비석을 세우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일백리 밖 새재에 세우는 이유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며 김수근 본인도 이 고개를 오가며 경관을 즐겼던 곳이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밝히고 있다.

김수근 타루비는 규모면에서 꽤나 큰 비석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비석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에 두었던 초석들의 크기 또한 우리 문경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여하간 당시 문경과 관련이 없던 인물의 비가 문경새재에 세워진 것만 보아도 당시의 김수근의 위세가 대단 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임종 전 도대체 어떠한 유서를 남기셨길래 퇴계 선생 이후의 안동에 비석이 거의 없는가?

이 유서에는 첫 번째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두 번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했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하계마을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여기서 바라보면 평소 퇴계선생이 오가산(吾家山)이라 일컬을 만큼 평소에 즐겨 찾고 좋아하셨던 청량산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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