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의 신라때 이름은 '동잉음현', '무쇠이어짐 골'이란 뜻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포항시 북구 신광면의 한 논 앞에서 바라본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비학산 전경.

포항시에서 국보(國寶) 두 개가 발굴됐다고 하면 놀라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1989년4월 포항시 북구 신광면(神光面) 냉수리(冷水里)의 언덕바지 밭에 묻혀있었던 '영일냉수리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요, 또 하나는 2009년5월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서 발견된 '포항중성리신라비(浦項中性里新羅碑)'다.

영일냉수리신라비는 당시 '최고로 오래된 신라비(新羅碑)'라 하여 우리나라 고고학계(考古學界)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는데 , 이 냉수리 신라비보다 연대가 약간 앞서는 것으로 보아지는 중성리신라비를 또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신광에서 흥해로 이어지는 이 지역의 고대사적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는 쾌거(快擧)였다.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 마당에 있는 영일냉수리신라비.

그런데 이 두 개의 소중한 국보가 현재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 지 궁금하다. 포항시민은 이 처참한 현실에 눈떠야 할 것 같다. 우선 신광에 가봤다. 포항시 신광면 면사무소 마당에 작은 비각(碑閣)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냉수리신라비가 이름뿐인 자물쇠로 가두어져 있다. 허술한 울타리 사이로 새들이 마구 드나들어 하얀 배설물을 비석 위에 뿌린다. 비바람도 불어 닥친다.

국보 264호는 이 같은 상태로 벌써 25년째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바위에 새겨진 비문(碑文)도 흐릿해졌다.

고대의 사철을 캔 것으로 추정되는 비학산 기슭의 개울.

그럼, 중성리신라비는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 이쪽 신라비는 아예 '포항' 호적을 박탈당한 채 국립경주박물관에 갇혀 있는 형편이다. 2009년에 발굴됐으니 벌써 5년째 '관람석'에도 못 들어간 처참한 국보. 경주시에 빼앗긴 셈이다.

'국보'란 무엇인가. 사전 풀이를 보자. "나라의 보배. 중요한 문화재 중에서도 특히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 미술적으로 뛰어난 것,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문화관광부장관이 지정한 건조물·조각공예품·고문서·서적·회화 등. 국보로 지정된 물건의 소유권은 여러 가지 제한을 받으며 법률로 특별한 보호를 하도록 되어 있음. '국보 제1호'는 숭례문(남대문), '제2호'는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다층석탑이다."(새우리말 큰사전)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포항에서 발굴된 두 국보 모두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특히 '영일냉수리신라비'의 학술적·역사적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이 높다. 그런데 이 신라비가 망가지고 있다.

폭 70㎝, 높이 60㎝, 두께 30㎝로 장정 서넛이 겨우 들어 올릴 만큼 무거운 화강암에 빼곡히 새겨진 231자의 한자는 지금 볼 나위 없이 지워져가고 있는 것이다.

'서기 503년'에 만들어진 비석이다. 비석에 새겨진 '癸未年(계미년)'을 비석의 글 내용과 견주어 추려낸 제작 연대다. 503년이라면 신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500년~513년) 때의 일. 경주 대능원 천마총(天馬塚)의 주인공이다.

지증왕은 참 재미있는 걸물(傑物)이다. 남근(男根)의 길이가 자그마치 한자 다섯 치나 되어 배필을 얻기 힘들었다. 전국 곳곳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몸집이 큰 대녀(大女)를 찾아내어 간신히 장가간 임금으로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울릉도의 오랑캐들을 몰아내어 신라 영토로 만든 임금이요, 소를 부려 농사일을 하게 한 최초의 왕이기도 했다.

사로(斯盧), 사라(斯羅)라고 각각 불리고 있던 나라 이름을 처음으로 '신라(新羅)'라고 정한 임금도 지증왕이었다. 요컨대 매우 개혁적인 지도자였던 셈이다.

키 8척의 거인이었고, 북방에서 흰 말을 몰고 왔다는 임금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만들게 한 주인공이다.

지금부터 약 1천500여 년 전 지증왕은 신라의 도읍 서라벌(지금의 경주) 북쪽 50리에 있는 동잉음현(東仍音縣) 진이마촌(珍而麻村)에 비석 하나를 세우도록 명령한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다.

비석의 내용은 △이 진이마촌에 사는 사나이 절거리(節居利)에게 '재물(財物)' 얻는 권리를 주기로 한다는 것과 △절거리가 죽은 다음에는 그 집안의 사노(斯奴)에게 그 '재물'을 상속케 한다는 것. △지금까지 그 재물을 챙겨 온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두 사람은 앞으로 이 재물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통고하는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계미년(癸未年) 9월25일, 지도로갈문왕(지증왕)을 비롯한 사라(신라의 옛 이름)의 일곱 어른은 지난 날 결정한대로 절거리가 재물을 몽땅 차지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말추와 사신지 두 사람은 앞으로 이 재물에 대하여 일절 관여치 않게 하며, 만약 이를 어기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을 받든 일곱 명은 임무를 마친 다음 소를 잡고 널리 알린 뒤 여기에 기록함을 엎드려 보고합니다….-

이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에 새겨진 231자의 한자 글발이다. 이 글발은 모두 한자로 새겨져 있지만 순수 한문(漢文)은 아니고, 지명(地名)과 인명(人名)은 물론이고 태반이 이두체(吏讀體)로 되어 있어 해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한글이 없었던 시절, 즉 세종대왕이 '한글'이라는 한국 최대의 발명품을 만들기 이전의 글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자(漢字)의 음독(音讀)과 훈독(訓讀), 즉 한자에서 빚어지는 '소리'와 '새김'을 이용하여 '한자로 우리말을 알리는' 이두(吏讀)라는 대(大)발명품을 만들어냈다.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슬기로운 민족이었다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일냉수리신라비에 새겨져 있는 지명(地名)과 사람 이름도 모두 이두체로 되어있다. 지명과 인명을 우리말로 제대로 풀면 이 신라비의 비밀도 모두 제대로 풀리는 것이다. 요술처럼 재미 있는 이 이두 풀이를 한 가지 소개한다.

우선 신광(神光)의 옛 이름 '동잉음현(東仍音縣)'부터.

신광은 옛날에 동잉음현이라 불렀다. 한자 표기는 '東仍音縣'. 그러나 이것은 한문(漢文) 이름이 아니다.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이두체 이름이다.

한자 '동녘 동(東)자'는 우리 고대어로 '새'라 읽는다. 우리 고대어라기보다는 신라말 또는 포항 사투리라 해야 할 것이다. 포항 사람들은 동풍(東風)을 '샛바람'이라 부른다. 포항은 특히 샛바람이 세차게 부는 고장이다. 그래서 겨울엔 춥지만 여름엔 아주 시원하다. 해수욕에 적합한 바닷가 도시인 셈이다. 동녘을 '새'라 불렀지만 '새'는 신라말로 '무쇠'를 가리키기도 했다. 신라 사람들은 '무쇠'를 새, 시, 수, 소… 라고 여러 S음으로 다양하게 발음했다. 따라서 한자 '東'자로 무쇠의 '쇠'를 표현하기도 했다. 동잉음현의 '동'도 '새', '쇠'로 읽어야 한다.

'仍音'은 '잉음'이라 읽는다. 한자 사전을 뒤지면 '仍'은 ①인(因)할 잉(因也) ②그대로 잉(尙也) ③거듭할 잉(重也)…이라고 나온다. '仍'이라는 한자에는 '그대로 있다', '겹치다'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東仍音'의 '音'자는 그대로 '음'이라 읽는다. 삼자(三字) 모두 합치면 '새잉음'이 된다.

'새잉음'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지명인가.

①'새'는 무쇠를 가리키는 신라말이다. ②'잉음'이란 '이어짐'을 가리키는 신라말이다. ③따라서 '새잉음'이란 '무쇠 이어짐'을 가리키는 신라 말임을 알 수 있다. 신광의 신라 때 지명은 '무쇠 이어짐'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잉음현(東仍音縣)'이란 '무쇠 이어짐 골', 즉 사철(砂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고을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신광의 어디에 사철이 켜켜이 쌓여 있었을까.

비학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골짜기 개울이다. 신광 사진 취재를 따라 가면서 비학산 중턱에서 큰 개울물을 만났다. 청회색(靑灰色) 큰 바윗돌 사이를 누벼 개울물이 흐른다. 그 바윗돌 아래 고여 있는 붉은 사철 조각들. 옛 추억을 덮고 흔들리는 야생초의 푸르름이 싱그럽다.

이 골짜기에서 고대의 사철 캐기는 이뤄졌을 것이다. 비학산(飛學山)골짜기는 아직도 동잉음현 즉 '쇠이음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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