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작고…12일 발인, 대구·경북서도 애도 분위기

9일 오전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관계자들이 문상객을 기다리고 있다.

경북 영일군(포항시) 출신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8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코오롱그룹은 이 명예회장이 이날 노환으로 작고했다고 밝혔다.

이 명예회장은 신라시대부터 '신의 빛이 비치는 곳'이라는 뜻으로 불리던 신광면(神光面)이 고향으로 이 곳은 일제시대 경상북도 영일군으로 개편됐다.

1922년 음력 4월 1일 이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부친 이원만(李源万) 공과 모친 이위문(李渭文) 여사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스승 회재 이언적의 16대손이다.

가문의 위세만 보면 어마어마한 지주 집안의 아들인 것 같지만 유년시절을 극심한 가난의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1933년 경북 산림조합의 기수보로 공직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가산을 정리해 훌쩍 일본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1년 간 학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다녔으며 보통학교를 수석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포항의 대하(오오시다)상점 점원으로 취직해 입에 풀칠을 했다.

이원만 선대회장이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모자 사업을 시작할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흥국상고와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고국으로 건너온 후인 1957년 부친을 도와 대구시 동구 신천동 1090번지 농림학교 부지와 실습지인 뽕밭을 매입해 코오롱그룹의 모태인 국내 첫 나일론 공장인 한국나일론을 설립했다.

이 명예회장은 부친이 정계에 진출한 뒤 당시 폭발적인 나일론 수요에 힘입어 한국의 화학섬유산업 시대를 열었다.

고인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코오롱상사, 코오롱나일론, 코오롱폴리에스터의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코오롱그룹의 외형을 키웠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4년간이나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지내며 경총의 기반을 닦았고 1989년에는 경제단체협의회 회장을 맡는 등 경제단체를 앞장서 이끌었다.

1970년 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80∼1990년대 대한농구협회장, 대한골프협회장 등을 지내며 한국 체육계 발전에도 한몫했다.

금탑산업훈장(1982년, 2004년), 체육훈장 백마장(198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1992년, 2004년), 체육훈장 청룡장(1992년, 2004년)을 받았다.

자서전으로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1992년), 경영어록집으로는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1982년)가 있다.

미술에도 관심을 보여 직접 그린 그림으로 1992년 고희전, 2001년 팔순전 등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9일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틀째 이어졌으며 대구와 경북지역에서도 경북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사업 기반을 닦은 고인을 애도하는 분위기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김승연 한화 회장과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이석채 전 KT 회장,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등 재계와 금융계 인사들이 이날 빈소를 찾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세균 의원,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등 정계와 언론계 인사들의 조문도 잇따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추모 논평을 통해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현대화와 노사간 산업 평화를 선도해온 이동찬 명예회장의 별세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이 명예회장은 한국에서 나일론을 최초로 생산해 화학섬유산업의 기반을 다졌고, 국내 섬유산업이 수출산업으로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고 신덕진 여사(2010년 작고)와 사이에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등 1남5녀를 뒀다.

장례는 코오롱그룹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2일 오전 5시, 장지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금릉공원묘원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