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일본서 태어나고 자란 석탈해왕, 신라 공주와 결혼 신라왕이 된 사연?

이영희 전 포스코인재개발원 교수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때 일이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에 어떤 배가 와서 멈추었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을 피우며 그 배를 맞으려 했으나 배는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 쪽으로 달아났다.

이 때 마침 포구에 아진의선(阿珍義先) 할멈이 있어 달아나는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할멈이 배를 보며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尺)에 넓이는 13자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메어두었다. 이윽고 궤를 열어보니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으며 노비(奴婢)와 일곱가지 보배 즉 금, 은, 유리(옛날엔 유리도 보배였다), 수정, 백산호, 붉은 진주, 마노 등이 가득 차 있었다. 사내아이와 노비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나는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요. 우리나라에는 원래 28용왕들이 있어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났으며 나이 5세, 6세부터 왕이 되어 만민(萬民)을 가르치오. 부왕(父王)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7년만에 커다란 알 한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신하를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어 보석과 노비들과 함께 배를 실은 다음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집을 이루도록 해주시오-했더니 갖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신라 탈해 왕능. 석탈해는 죽어서도 경주 이씨(李氏)와 이웃해 있는 셈이다. 왕능 바로 옆에 경주 이씨(李氏) 사당이 있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짚으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吐含山) 위에 올라가더니 돌집을 지어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서라벌 성(城)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 오래 살만한 곳 같았다. 이내 그 곳을 찾아가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아이는 이에 속임수를 썼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이튿날 아침, 그 집에 가서 "우리가 살던 집"이라 우겼다. 관청에다 고발도 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었소. 잠시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것이오. 그러니 그 집 땅을 파서 조사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오." 이 말에 따라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이래서 이공(李公)의 집을 빼앗아 살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 제4대 탈해왕조에서.

탈해 왕능. 소나무가 절하듯 능을 향해 기울어 자라고 있다.

이공이 살던 이 집이 바로 반월대(半月臺) 즉, 반월성(半月城)자리다. 이 때 신라 제2대 남해왕은 석탈해가 지혜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게 했으니 이가 바로 아니(阿尼)부인이다. 이래서 석탈해는 바다 건너 왜(倭)에서 온 사람으로 드물게 신라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엔 석탈해는 아주 딴 모습으로 등장한다. -왜의 완하국(玩夏國) 왕의 부인이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변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다. 이 탈해가 바다 건너 가락국에 왔다. 그는 키가 3척(약1m) 머리둘레가 1척(약 30㎝) 정도가 되는 난장이었다. 그가 가락국 국왕 대궐에 들어와 말했다.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김수로왕은 물론 마다했다. 그러자 탈해가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보겠소?" 하니 왕이 좋다고 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대로 산꼭대기에 발자취를 남긴 경주 이씨(李氏) 조상.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하여 매가 되자, 임금은 순식간에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자, 왕은 새매로 변했는데 그 변하는 시간이 조금도 더디지 않았다. 탈해가 본모습으로 돌아오자 임금도 원래 모습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했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데 있어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모두 왕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는 어진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툰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탈해는 곧 왕께 절하고 나가서 이웃나루터로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오가는 수로를 따라 떠났다.

알천 양산촌의 시조 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목욕한 곳이라고 전해온다.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뒤따라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의 땅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을 모두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글은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석탈해왕에 관한 신라의 기록과 금관가야국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을 보았다. 그럼 일본 역사책은 석탈해왕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서기 712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古事記)'에는 석탈해(昔脫解)왕 이야기를 본뜬 듯한 작은 신 스크나히코나신(小名毘古那神)을 소개하고 있다.

-대국주신(大國主神)이 이즈모(出雲)에 있을 때였다. 박주가리 열매로 만든 아주 작은 배를 타고 나방 껍질을 벗겨 그것을 웃도리로 입고 바다 위를 다가서 오는 신이 있었다. 이름을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두 신(神)은 그 후 힘을 모아 이 지방을 개척했으나 작은 이는 훗날 바다 건너에 있는 상세국(常世國)으로 건너가버렸다.고 한다.

일본 도쿄(東京) 한복판 빌딩 옥상에 있는 스크나히코나약조신사(少彦名藥祖神社). 제약회사들이 만든 신사다.

'고사기'에는 또한 남자신(神)과 여자신의 남매 신이 성행위를 하여 뼈 없는 다리를 지닌 아이를 낳게 된 이야기도 싣고 있다. 이들 남매는 할수 없이 갈대로 엮은 배에 아이를 실어 먼 나라로 보낸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한치(一寸)법사(法師)'라는 유명한 옛이야기도 전해진다. 키가 한치 밖에 안되는 작은 몸매의 아이 이야기다. 한치법사는 자기 집을 떠나 남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데 도깨비를 물리쳐서 많은 보물을 차지하고 도깨비 방망이로 자기 키도 크게 하여 부자집 딸과 결혼해서 잘 살게 된다는 해피엔드 이야기다.

알에서 태어나 신라 왕의 딸과 결혼, 신라왕이 된 석탈해의 일생을 닮은 이야기가 아닌가. 석탈해는 아직 살아 있다. 한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일본 오사카(大阪)시에 있는 스크나히코나신사(少彦名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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