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추진력으로 한국공업화시대 연 ‘역사적 슈퍼스타’…새마을운동 ‘민생고·식량난’ 해결

△윤용희, 전 경북대 사회과학대학장이 보는 '박정희 업적'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16년 동안 과오를 제외하고 정책과 업적을 원고 다섯 매로 논술한다는 것은 양적 한계와 논술 균형성의 한계가 있음을 미리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정책과 업적은 '잘 살아보자는 국가의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국가 및 경제발전정책의 수립과 강력한 추진력'이라 할 수 있다. 국가발전의 방향을 민족중흥과 경제적 근대화, 교육입국에 두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정책으로 정신혁명운동, 산업구조의 개혁과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농업발전을 위해 전국적인 경리정리와 농업의 기계화, 비료공장 건설을 위시한 비료생산과 퇴비증산 그리고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로의 종자개량과 새마을운동으로 국민들의 민생고와 보리고개, 식량난을 해결하였다. 농업에서 공업으로 사회구조와 국가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꾸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으로써 전형적인 사회간접자본인 경부고속도로와 항만, 철도의 건설과 현대화, 대단위 공업단지의 조성, 포항제철과 현대조선, 중공업 등 국가 기간산업을 육성, 발전시켜 오늘날 중화학공업과 IT 강국의 기초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국민들의 새로운 정신혁명으로 근면, 자조, 협동정신과 근검절약운동, 저축정신으로 모자라는 산업자금을 조성하는 새마을사업 전개는 국민정신운동과 경제적 근대화의 원동력 역할을 하였다. 빈곤으로 배고픔과 무지의 한을 풀고, 부존자원과 재정이 없는 국가에서 발전과 도약의 원동력은 '인재'라는 것을 일찍 깨달은 교육입국과 인재육성정책은 오늘날 국가발전과 경제건설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안목 있는 비전제시와 장기적인 국가발전정책과 강력한 추진력, 훌륭한 인재육성과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 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준 리더십으로 최빈국에서 한 세대 만에,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기초를 마련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한석태, 전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박정희 평가'

1961년 소장으로 제2군 부사령관에 재직중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며 5·16군사쿠데타를 주도, 2년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다. 정당·사회단체 해체, 용공분자와 깡패 검거 소탕, 댄스홀 및 고급요정 폐쇄, 부정축재환수 등을 단행했다. 국토 및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함으로써 조국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군정실시 2년 후에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공언해 1963년 '2·27선언'으로 원대복귀를 약속했으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발표했다가 국민여론에 밀려 철회하기도 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돼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 1967년 7월 제6대 대통령 재선됐다. 1965년 한일간에 국교를 정상화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했다. '보릿고개'라는 고질적 춘궁기로 상징되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이 절대빈곤의 극복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3선개헌에 의해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해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신시대를 통해 절대빈곤은 해결됐다.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뤄지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및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국민의 지지가 약화되자 '긴급조치' 발동으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유신체제에 항거한 1979년 부산 마산시민이 봉기한 '부마사태'에 직면해 측근에 의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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