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이 보이지 않는다. 국가가 그렇고 사회가 그렇다. 무엇보다 국가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특권층의 리더십이 ‘근본 결핍증’에 걸려 있다. 힘만 좀 있으면 탈 ·불법을 서슴지 않는다. 근본이란 한마디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자기통치 원칙’이다.
국가나 사회, 집단과 개인에 있어서 이 근본은 행위의 정신적인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국가나 사회의 근본은 구성원 모두의 약속이자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법치(法治)’인데, 이것은 곧 사상가 루소가 사회의 근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은 사회적 신뢰에 의해서만이 지탱될 수 있다.
국가사회의 근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적 신뢰의 지반침하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사회적 약속인 법질서의 토대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치가 난무하는 근본 부실의 국가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는 만무하다.
법치의 ‘티격태격’, ‘작용과 반작용’의 제로섬적 갈등구도가 우리 국가사회의 추진력을 빼앗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여전히 맞춰지지 않고 있는 노사간의 갈등, 가진 자의 편법과 무책임, 못가진 자의 불신과 불만 등 우리 국가사회는 심각한 갈등과 모순의 모자이크를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들려오는 일련의 소식들은 우리 사회의 이같은 구조적 악순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어서 씁쓸하다.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한나라당 정형근의원 등 정치인 관련 고소·고발사건에 대해 일괄적으로 각하 혹은 무혐의 처분을 하고, 현재 계류중인 나머지 사건들도 조기 종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왠지 뒷맛이 개운찮다. 잘 다듬어진 정치권의 ‘약속된 드라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처럼 법을 가볍게 생각하고 유린해도 되는지 비감스럽다. 법을 수호해야할 검찰마저 정치인의 드라마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연루된 사건은 조사 자체가 어렵고 사건의 규명 역시 쉽지 않다’는 검찰의 궁색한 변명은 더욱 가관이다.
대다수의 국민이 사법부를 불신하고 법 위에 특정권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지나간 강원도 횡성이나 서울 신림동의 수재(水災) 모두 ‘준비된 인재(人災)’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이들 인재들이 모두 근본의 부재 혹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 국가사회의 위기는 이제 실제상황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정치를 참된 지식을 가진 소위 ‘아는 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크라테스류의 절대적인 지식을 가진 ‘초인적 지자(知者)’가 아니다.
이 시대 이 땅의 참된 지식은 너무도 쉽다. 삼척동자도 다 안다. 국가사회의 신뢰와 질서와 지탱하는 근본을 지키는 것, 즉 법치이다.
우리의 국가사회는 이미 이 땅의 10%가 주도하고 있다. 물론 산술적 수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근본을 망각하고 기피하기까지 한 그들이지만 이 10%가 근본 회복의 열쇠 역시 쥐고 있음은 분명하다.
플라톤 연구가인 그레고리 블라스토스(Gregory Vlastos)는 통시대적 식자(識者)였고 폴리스정치를 염려했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를 향하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테네시절이나 지금이나 이기적인 건식(乾式) 식자와 지도층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건조한 식자’보다 국가사회를 위해 울 줄 알고 근본을 소중히 생각하는 ‘촉촉한 10%’가 더 절실하다. 이 땅의 90%는 오늘도 또 한번 우리사회 10%의 자기반성과 淨化에 한가닥 기대를 걸면서 마지 못해 이 사회에 발붙이고 있다. 이 땅은 100%의 것이다.
90%없이 10%만 살 수 없음을 10%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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