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을 열며

우리 집 베란다에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미색(米色)에, 세모시 같은 정갈한 자태로 아련한 향까지 데리고 왔다.
베란다 화분의 난(蘭)이 꽃을 피웠다. 언제나 놓아둔 그 구석진 자리에서 살뜰하니 보살핌도 못 받았는데, 난월(蘭月)에 때맞춰 꽃을 피운 것이다.
나는 화분을 잘 사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꽃을 좋아한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다 식물에 무지한 사람이 집안에 화분을 사 모으는 행위는 인간의 소유욕으로 그들을 감옥에다 가두는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도 우리 집 베란다에는 제법 많은 화분이 있다. 이러 저러한 축하 화분이며 집들이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그런 저런 인연들로 나와 연이 닿은 우리 집의 화분들은 참 불쌍하다. 목마르다고 고개를 푹 숙여야 그때 물이나 주는 게 고작이다. 심지어 화분에 돋아나는 잡초도 뽑지 못하고 그냥 둔다.
어느 날 화분에 물을 주면서 나와 눈이 마주친 괭이밥의 노랗고 쬐그만 꽃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인데도 참으로 예뻤다. 인간들은 제자리에 나지 않은 모든 식물을 잡초라는 이름으로 매도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잣대로 보았을 뿐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집 화분에는 괭이밥이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꽃을 피운 소심이란 난은 집들이 선물로 삼 년 전에 우리 집에 왔다. 우리 집에 온 후로 한 번도 분갈이를 해 주지 않아 심줄 같은 뿌리가 흙 위에까지 뻗어 나와 주인의 무신경에 항의를 하는 모양새다.
그런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꽃대를 세대나 올려 모두 열두 송이의 꽃을 피웠다. 아침에 일어나 마루로 나오면 베란다에서 풍겨오는 알싸한 그 향기에 애가 탄다. 좀더 가까이 가서 짙은 향내를 원해도 언제나 그만큼의 내음만 풍긴다. 나도 감히 난을 닮고 싶다. 수수한 듯 하지만 청아한, 쉬이 목말라하지 않고 오래 참으며 기다릴 줄 아는,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한결같은 향을 지닌, 난초(蘭草) 같은 여인이 되고싶다.
달빛 속에서 열두 송이의 꽃은 열두 마리의 학으로 변신을 하고 달빛과 버물어진 난향은 나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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