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는 萬人間투쟁의 쓴 열매

사상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가 지적하는 인간의 본능인 방화벽(放火癖), 그것은 결국 테러로 현재화할 수밖에 없다. 카네티의 말처럼 인간은 어디든 불을 지르고 싶어한다. 특히 자신의 적들이 쌓아올린 문명에 불을 지르고, 명예에 불을 지르고, 사상에 불을 지른다. 이 방화는 홉스적 ‘萬人間 투쟁’의 쓰디쓴 열매에 다름 아니다. 한마디로 테러인 것이다.
세계사를 펼쳐보면 명장면(?)은 예외없이 인간의 방화에 의해 불타고 있다.
인간의 방화는 대륙과 인종, 대상, 수단을 불문한다. 로마에서 유럽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이제 뉴욕을 지나 아프카니스탄에서 방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방화는 강자의 논리와 약자의 논리가 양보 없이 충돌하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강자든 약자든 자신을 善의 중심축으로 하는 ‘善惡의 구도’를 만든다. 국내든 국외든, 국가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적을 찾아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것들을 악의 범주에 집어넣는다.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약자의 논리로 무장하였고 결국 테러라는 본능적 방화벽에 이끌려 갔던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분노로 뉴욕을 불태우고 미국의 헤게모니까지 불태우려고 했다. 이 라덴의 테러는 미국을 한동안 마비시키고 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소 진정은 되었지만 그 부정적 여파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극심한 테러의 해악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미국을 보면서도 미국보다 우리가 더 걱정스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토록 견고하게 보였던 미국과 미국사회가 테러리스트 한사람의 손 끝에서 무참히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정작 보아야할 우리 사회의 위험성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덴을 비난하기에만 바빴지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위험한 테러리스트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사회의 상공에는 뉴욕 상공을 가로질렀던 라덴의 자살비행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폭발력을 지닌 테러용 ‘말’들이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을 향해 무차별 난사되고 있다.
강자 약자를 떠나서 논리의 충돌, 집단이기주의의 갈등과 그로 인한 집단방화 곧 말의 테러가 자행되고 있다. ‘말의 테러’는 무엇보다 정신가치를 왜곡, 파괴한다는 점에서 그 해악은 어느 테러보다도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 그 화염과 파편이 불특정다수인 국민의 머리 위에 쏟아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정치판이 자행하는 말의 테러는 참으로 심각하다. 무책임하게 던져놓고는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뿐이 아니다. 최근에는 소설가 이문열씨가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비판함으로써 촉발된 여당 등 개혁세력과 이문열씨 등속(等屬)이 벌이고 있는 소위 ‘이문열과의 전쟁’이 비난을 위한 비난 등으로 과열양상을 보이면서 언어의 폭력을 동반한 말의 테러가 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다.
말의 테러로 인해 당장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인명이 살상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고 시대정신의 근간을 붕괴시킨다.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국가사회, 민족의 해체로까지 연결될 수도 있다.
정치권은 악취나는 흑색선전의 습성을 버리고, 국민들은 너나 할것없이 언어의 현란한 논리 속에 숨겨져 있는 상대방에 대한 폭력과 살의(殺意)를 버려야 한다. 당리당략과 집단이기를 버려야 한다.
公利를 망각한 곡론(曲論), 난필(亂筆)은 시대정신을 혼돈 속으로 빠트릴 뿐이다. 가뜩이나 사분오열된 우리 국가 사회를 추스리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결국 테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가슴에 묻혀 있는 방화벽을 억제함으로써 테러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추방해야 한다.
소아(小我)적 개인이데올로기로서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公利와 대의명분을 버렸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고 있는 라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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