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불명 기념일 너무 많아

블랙 데이, 레드 데이, 로즈 데이, 레터 데이, 뮤직 데이….
청소년들의 머릿속의 달력은 온통 ‘데이(day)’로 빽빽하다. 실제로 달력에 없는 청소년들만의 기념일이다.
청소년들은 왜 각종 기념일을 정해 놓고 이토록 열광할까.
특정 선물을 주고받는 날, 단순히 상술에 놀아난다고만 보기엔 청소년층의 반응이 너무나 뜨겁다.
11월 11일엔 ‘빼빼로 데이’라고 해서 젓가람처럼 기다란 과자 ‘빼빼로’를 주고 받는다. 왜 하필 11월 11일일까? 1이 네 번 겹치면 작대기 4개를 이루는 이날 청소년들은 ‘키 크자’ ‘살 빼자’며 빼빼로를 나눠 먹고 우정을 확인하거나 애정을 고백하기도 한단다.
빼빼로 데이보다 덜 유명하지만 새우깡 데이, 에이스 데이, 미니쉘 데이, 죠리퐁 데이도 있다고 한다. 각종 ‘데이’의 원조는 발렌타인 데이(2월 14일)에 이어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 등 유사 데이가 자리를 잡았다.
또한 키스 데이, 링 데이, 뮤직 데이, 백일 데이, 인형 데이, 선물 데이 등 1년에 수십 개씩 난무하는 각종 기념일은 청소년 사이의 은어처럼 날짜, 학교, 지역성에 따라 제각각 차이가 있다.
청소년 사이에 퍼진 별별 ‘데이’는 고도의 상술이 불을 지핀 현상이기도 하고 청소년들의 불안 심리가 반영된 거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적, 대학 진학 문제, 외모, 이성 문제 등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모두 청소년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성장기의 화두들이다.
불안감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또래 유행에 집착하는 청소년들과 뭐든지 ‘전수’를 만들어 나서는 상술의 절묘한 결합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 어느 단체에서 ‘발렌타인 데이’ 대신 대보름날 부럼이나 떡을 돌리자는 새로운 운동을 폈지만 청소년들의 싸늘한 외면을 받은 바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것이 오히려 생경해서 외래 문화에 젖은 탓도 있지만 청소년들은 ‘촌스럽다’고 무시하고 돌아서 버린다.
청소년들은 답답한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특정 날짜에 함께 자장면이나 빼빼로를 먹으며 잠깐씩 해방감을 즐긴다고 어느 청소년 기관에서 밝힌 바 있다.
최대의 공포인 대학 입시를 앞두고 학생들은 휴지(잘 풀어라), 도끼·카메라(잘 찍어라), 돋보기·거울(시험 잘 봐라) 등 기발한 ‘수능 상품’이 판을 치며 짧은 순간이나마 즐거워하던 적도 있다.
하루 날을 잡아 특정한 상대와 뭔가를 주고받는 행위에 크게 집착하기도 하고,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 비디오 언약이란 걸 찍기도 하며 무슨 무슨 데이가 돌아올 때마다 선물을 못 받아 소외감을 느끼면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고백한 청소년도 있다.
시험보다 자주 돌아오는 각종 기념일에 맞춰 가지각색의 선물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하고, 못 받으면 속상해 풀이 죽는 청소년 사회의 풍경을 어른들은 꾸짖어야만 할까?
답답한 청소년들의 건전한 탈출구를 마련해 줘야 한다.
청소년 수련관이나 청소년 쉼터 등 청소년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한편 청소년들의 건전한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그들만의 젊음을 자유롭게 발산하고 만끽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가 관심을 갖고 배려해 줘야겠다. 더 이상 어린이 세계에까지 번지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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