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공중의식 희박

어떤 젊은이가 오랜만에 약수터에 물 뜨러 갔다. 물통을 차례대로 놓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조금 있다가 아버지 친구분이 오셨다. 인사를 하고는 앞서서 물을 받으시라고 자리를 양보해 드렸다. 또 좀 있다가 집안어른이 올라오셨다. 인사드리고 또 한 차례 자리를 물렸다. 이번엔 또 안면있는 고향사람이 오셨다. 다음엔 동창이 보이고, 언젠가 신세진 사람도 만나고, 또 직장의 선임자, 좀 아는 사람을 연거푸 만나자 그때마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차례를 양보하였다.
최재석 교수의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공중의식의 부재를 가정하여 설명한 예이다. 위 사람은 아마도 인사성 바르고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아는 사람? 또는 그의 배려(配慮)를 받은 사람의 범위 내 칭찬일 뿐이다. 상당히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동임이 틀림없다.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것이 뻔한 타인들에게서는 몰매를 받아도 부족할 짓이며, 따라서 그는 공중도덕, 질서의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야만인일 수도 있다.
좀 과장적일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우리 한국인의 문화의식의 한 단면이다. 여기서 더 확장되면 아는 사람은 ‘우리’이고 모르는 사람은 무조건 ‘남’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우리 가족, 우리 집안, 우리 지역, 우리 학교, 우리 나라 등 ‘우리’의 범주는 무한대로 넓어질 수 있다. 한때 유행했던 경상도식 정치성 농담, “우리가 넘이가?”도 이 ‘우리’주의의 확장개념이다. 나쁠 것 없다. 그러나 우리의 바깥에 있는 남을 배척하는 배타성이 문제가 된다. 한국인의 집단주의 사회의식은 여기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집단주의 의식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함으로써 야기되는 배타성(排他性)이 문제일 뿐이다. 배타성은 나와 다른 것,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배척하는 성격이다. 소위 ‘왕따’문화도 이에서 비롯된 고약한 사회적 문화다.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태부족한 것이며, 학연, 지연 등의 연고주의를 중시하는 문화는 모두 이에서 비롯된 사회적 병폐다.
집단주의의 폐해인 배타성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은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고 하나 참으로 오랜 동안 형성된 문화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안 될 것이라고 지레 포기하는 것만큼 또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한다. 집단주의의 ‘우리’ 의식을 무한대로 확장해보자는 것이다. 장애인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우리 이웃, 중국동포와 연변총각은 당연히 우리 겨레, 살색 다른 외국인도 지구촌 시대의 우리 이웃동네 사람, 동물도 이 지구촌에서 함께 숨쉬는 생명 등.
그리 되면 ‘우리’의 범위 내에 들지 않을 것이 없으니 배척할 이유가 없다. 이 모두가 내가 아는 범위에 드니 당연히 배려의 대상자인 것이다.
배려(配慮)란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 또 배려(配慮)란 약자에 대한 강자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면 그 만큼 쉽고 하기 즐거운 일도 없다. 공중도덕을 지키고, 서비스정신을 키워야 한다면 집단주의를 긍정적으로 확장한 배려문화의 형성에서 출발하면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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