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교육적 책임 망각

덕담으로 장식된 새해 벽두의 우리 언론에 일제히 우울한 소식 하나가 나왔다. 반부패국민연대가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고교생 91%가 한국사회는 부패사회’라는 인식을 갖고 있고, 부정행위가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 64%가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거나 가벼운 처벌밖에 안받기 때문’이라 답하고,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정치권’을 꼽았다는 것이다.
이 보도를 읽는 나의 눈앞에 문득 작년 12월 28일 대구고법 형사법정 피고석에서 ‘벌금형 2000만원’을 선고받고 돌아서는 한동대 김영길 총장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당시 피고인과 불과 두세 걸음 간격이었던 나는 마치 정체불명의 징그러운 유기물과 마주친 경우처럼 울컥 치솟는 구토증세 때문에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1심에서 징역 2년에 법정구속까지 먹었다가 2000만원 벌금형으로 바뀌었으니 목을 겨루던 칼이 치워진 듯한 기분이야 들었겠지만, 그 웃음에는 반성과 회개의 기색이 어른대지 않았다. 초중등교육법 위반(3년간 53명 학생에게 학기당 300만원 상당씩 받고 중·고교 과정의 무허가 한동국제학교 불법 운영), 교비회계를 법인회계로 불법 전용, 교육부 허가 없이 불법 기채, 국고보조금 불법 전용 등 여러가지 교육 관련법 ‘유죄’와 업무상 횡령죄로 무려 2000천만원 벌금형을 받고도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대학 총장의 얼굴을 TV화면으로 지켜본 청소년들이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법을 어겨도 징역형만 면하면 반성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은 제발 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김 총장의 그 웃음에서 내가 엿본 또 하나는 ‘도덕적 교육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날 위인이 아니구나’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말한 “대학 경영상의 어려움 때문에” 저지른 범죄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방패삼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면, 정녕 대학 총장의 그런 의식수준이 수용되는 사회라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생계형 범법자들은 죄의식을 버려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재판부에도 고언(苦言)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의 변호인들 중에 직전 대구고등법원장이 있어서 벌금형이 나올 것이란 유언비어가 떠돌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런 근거 없는 원망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다만, 교육 관련법을 솜방이로 만든 이번 판결에 쓰인 판사의 양심이 ‘숲은 보지 않고 나무만 보는’ 편협한 관점이었다는 짐작을 한다. 나의 짐작이 틀렸다면, 청소년 교육에 해로울 만큼 베푼 재판부의 그 관용에는 ‘이제 피고 스스로가 물러나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렇다. 한국 대학사에서 초유의 경악할 오점을 남긴 김영길 총장은 감독관청의 권고가 아니더라도 용퇴할 때가 되었고, 교육인적자원부 한완상 부총리는 사학개혁의 차원에서 당연히 문제의 총장을 퇴출시켜야 한다. 우리 청소년이 가장 부패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정치권에서도 국회의원은 벌금형 100만원만 받아도 의원직을 상실한다. 하물며 교육계에서 가장 존경받아야할 대학 총장이 ‘벌금 300만원, 벌금 100만원, 선고유예’ 등 3번의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가 다시 벌금형 2000만원을 받은 다음에도 자리를 지킨다면, 그런 한국사회는 부패의 늪을 빠져 나올 수 없다. 특히 그것은 좋은 사회에서 살아야할 우리 청소년에게 뻔뻔스럽고 부끄러운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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