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화국’ 지방공동화 초래

어릴 적에 도시의 쥐와 시골의 쥐에 대한 동화를 본 적이 있다.
물론 도시의 부유함과 삭막함 그리고 시골의 가난함과 푸근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골에서 자라던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서울에 가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으로 잠들곤 했다.
도시와 시골은 인류가 살아온 문화 유형이다. 그러나 도시문화는 지방문화의 산물이요, 지방문화는 도시문화의 어머니다. 그래서 도시와 시골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상호 보완적 문화유형이 되었다. 즉 제대로 된 나라에는 도시도 있어야 되고 시골도 있어야 한다.
도시문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한 시골이라는 바탕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은 도시에 젖줄을 대는 어머니요, 도시는 시골의 품을 그리워하는 자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산업화에 성공한 뒤에도, 특이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도 더욱 강력하고 폭넓게 진행되고 있다.
즉 국가의 모든 권력, 재력, 능력이 서울로 집중되는 반면에, 시골에는 공동화 현상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나아가 더욱 광범위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국가 시책을 결정하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해야 할 대부분의 정치인은 서울에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서울이 위기에 처한 다면, 누가 서울로 와서 대처할 것인가? 돈도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돈이란 돌아야 하는 것인데 만약에 서울의 경제에 공황이 발생한다면, 어디 있는 돈으로 충당할 것인가? 국가의 경쟁력은 학문과 과학의 인프라에 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은 그야말로 명실공히 서울 대학교가 되어 가는 실정이다. 학문은 유수한 전통에 기초하여 새로운 미래상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만약에 서울의 대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어떤 대학으로 개선하거나 대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거국적 문제들을 찾아내고 드러내야할 언론과 방송 매체들마저도 서울로의 집중을 가속화하고 있다.
서울의 관점에서 서울의 방식으로 어떻게 지방의 문제를 공론화 할 수 있겠는가?
한국적 문화를 개발하여 세계의 문화 충돌을 극복해 나가야 할 대부분의 예술인들과 스타들도 서울에서 산다. 도시와 지방의 만남과 교류에서 태동해야할 한국적 문화의 탄생을 어찌 삭막한 서울에서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서울과 지방의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은 시골 쥐가 서울가도 별 수 없는 순간이다.
서울 가도 별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때에는 이미 시골이 공동화되었을 때이다.
서울의 부유함과 찬란함을 꿈꾸는 시골 쥐가 더 이상 없을 때에는 결국 도시의 쥐들이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시골이 사라진 순간이다. 서울 쥐는 결국 푸근히 시골로 돌아가기 위해서 도시의 고된 날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서울 쥐는 언젠가는 안주할 시골을 무지개 저편에 간직해 두기 위해서 오늘의 도시를 사는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을 서울로 집중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시골 쥐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쥐들이 돌아가야 할 희망과 안식처를 말살하는 셈이 된다. 이제 서울가도 별 수 없는가? 결코 그런 순간이 오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골 쥐를 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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