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권·사은권 뭣하러 보내

지난 해 몸이 아파 침맞으러 다니게 된 한의원의 원장은 여의사였다. 활달하고 넉넉한 말품새가 사람좋아 보이고 자신의 전문직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당찬 여성이었다. 증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의사의 기본이겠지만, 그 사람 좋은 인상과 거리낌없는 말투가 친근하여 더욱 좋아 보였다.
침을 놓으면서도 환자들과 스스럼없는 농담까지 주고받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침술도 소문이 났던지 제법 먼 곳에서도 오는 환자들이 많아 시간을 잘못 맞추면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날도 많다.
내가 처음 간 날,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한의원 상호를 보고 여의사일 것 같은 생각에 왔다는 내 말을 듣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였다. 무슨 소리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랬다. 처음 그녀가 한의원을 개업했던 10년전만 해도 병원문을 들어오던 환자가 “어? 여자의사네?” 하며 되돌아 나간 경우가 많더라는 얘기였다. 알게 모르게 여성을 불신하는 풍조가 전문직에까지 있구나 싶어 서글펐는데 이젠 오히려 여의사라서 찾아오는 환자도 있으니 세상 참 좋아졌다며 크게 웃는 것이었다.
하루는 침을 맞고 누워 혼곤히 잠들려고 할 무렵, 그녀의 다소 흥분한 듯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지방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무슨 소린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 말을 뱉고 연이어 간호사에게 들으라며 하는 말을 들으니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잠시 환자가 없는 사이 그녀에게 온 우편물을 뜯어보고 있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그 중 아마도 카드사에서 날아온 대금청구서 속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사은권들을 확인하고 속상해 뱉은 말인 듯하였다.
그런 우편물들에는 고객에게 서비스한답시고 각종 문화행사의 할인티켓이나 놀이공원의 무료초대장 등이 끼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문화행사나 공연장이나 놀이공원들이 한결같이 서울특별시나 그 주변 수도권에 있으니 그 혜택을 보는 사람은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 뿐일 테니 거기서 소외된 지방사람은 알고도, 초대받고도, 또 가고 싶어도 가기 힘드니 사람도 아니라는 얘기였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그런 사은권은 지방사람에게는 그 효용가치를 떠나 이런 자조적인 자기비하까지도 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한참을 흥분하는 그녀의 말이었다.
참 절실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만큼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권력이 서울 한 곳으로 집중된 국가는 아마 이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문화권력의 서울 편중은 앞서의 그 어떤 것보다도 심각하다. 그럴 듯한 문화공간의 부족은 차치하고라도 연극, 공연물, 전시회 등 제법 고급한 문화를 향수할 만한 권리 행사를 지방사람은 꿈꾸기조차 쉽지 않다.
비싼 교통비와 시간을 쪼개서라도 서울 갈 수 있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여유있는 지방사람이 아니라면 그저 이따끔 시혜적 차원에서나 감상의 기회를 베푸는 지방순회공연이나 전시회를 감지덕지하며 살아야 하는 삶, 이 시대 우리나라 지방사람의 비애 아닌 비애다. 억울하면 서울 가지? 하며 자조적 삶을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작년 9월, 지방분권실현을 위한 전국지식인 선언에 이어, 지난 4월 13일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추진본부가 창립되었다. 그에 뒤이어 우리 포항에서도 포항본부를 준비하는 모임이 착실히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치, 경제적 분권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분권화를 실천적으로 끌어내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알찬 성과를 거두어 “지방사람은 사람도 아니다”라는 그 여의사의 말과 같은 지방사람의 자조적 열패감이 이 땅에서 깨끗이 없어질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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