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된 아이들 언어습득 불가능

또 한번의 어린이날을 보냈다. 며칠 전부터 선물 가게들이 어린이용품 판매로 붐볐으며, 크고 작은 행사들이 어린이를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
어린이를 위한 행사나 시책은 분명히 어린이를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린이를 빙자하여 단체의 홍보나 어린이 동원에 급급한 행사를 위한 행사는 사라져야 한다.
진정으로 어린이를 위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어린이날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이런 질문을 나눠봐야 한다.
기원 2500년 전 이집트의 푸사메코스 왕은 가장 오래된 민족을 알고 싶었다. 양치기에게 명하여 두 갓난아이를 오두막에 가두어 기르게 했다. 아이들은 어떤 사람이나 언어에 접할 수 없도록 격리되었다. 이 아이들이 사용하게 될 언어가 최초 인류의 언어일 거라고 믿었다.
비슷한 실험은 또 있었다. 인도 무갈 왕조 아크발 왕도 인간이 사용한 최초의 언어를 알고 싶었다.
갓 태어난 12명의 아기를 엄마한테서 빼앗아 탑 속에 가둔 후, 벙어리 유모를 붙여 기르도록 했다. 12년 간 아이들은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12년이 지난 후, 왕은 군중들 앞으로 아이들을 불러냈다. 그러나 이집트의 푸사메코스 왕과 마찬가지로 예상했던 결과는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잔혹한 실험을 거친 아이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언어로도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다. 짐승과 같은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격리된 아이들은 아무런 언어도 익힐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이후에도 인간의 말을 하지 못했으며, 신체적, 정신적인 발달과 습성까지도 익힐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어린 시절의 사람에 대한 경험 체계는 무서울 정도로 중요하다.
위인들의 평전을 보면 그들의 삶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며칠 전에 의거를 증명할 자료가 일본에서 새롭게 발견되어 언론을 장식했던 윤봉길 의사의 삶도 좋은 예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정도의 말썽꾸러기였다. 농아에 가까운 말더듬이에다가 성격이 난폭하여 말보다 주먹을 먼저 쓰는 싸움꾼이었다. 더구나 글공부에서는 다른 친구들의 절반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부진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그를 끝까지 지켜냈다. 어머니의 따뜻한 심성이 폭력성을 의협심으로, 이기심을 애국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청년 윤봉길은 김좌진 장군을 만나고, 중국으로 달려가 김구 선생을 만나면서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요즘 우리 어린이들이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혹시 학원 강사나 과외 선생님의 절대적인 영향 속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집 밖이 위험하다며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오락기 속에다 격리시켜 두지는 않았는가.
우리네 아이들은 도무지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없다. 어린이들이 살아가면서 삶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받을 수 있는 곳도 사람이다.
또 한번의 어린이날이 지나갔다. 어린이를 가공된 환경이나 한정된 사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그들의 문화와 삶의 자세를 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어린이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고 싶어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