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영 선<경주초등 교사>

입안이 소태같이 쓰다. 소태는 소의 코뚜레를 만드는 나무인데, 그 맛이 어찌나 쓴지 소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송아지 엉덩이에 뿔나기 전에 아버지는 소태나무 가지를 휘어 코뚜레를 만들어 끼웠다. 어미 소가 말뚝에 묶인 채 외양간과 마당을 오갈 때, 송아지는 아랫집 헛간 방에도 들어가 있고, 뒷집에도 또래를 찾아 놀러가곤 했는데, 그 자유도 이젠 끝이다. 그야말로 코뚜레를 꿰면 말뚝에 묶인 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못된 망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하더니, 고등학생 딸아이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엄마 몰래 귀걸이를 하고 다닌다. 언제 귀를 뚫었는지 엄마인 나도 모르는 새 어른 흉내를 내고 있다. 스커트는 타이트스커트처럼 몸의 굴곡이 다 들어나게 줄여 입고, 상의는 배꼽이 보일락 말락 깡충 올라가 있다. 교복을 맞춰줄 땐 분명히 저러지 않았는데, 엄마가 둔한 줄 아는 지 눈속임도 잘 한다.

못난 부분은 서로 상대방을 닮았다고 공격하다가 때론 부부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처음엔 멋 부리는 것과는 담을 쌓은 나를 닮지 않은 것 같아 은근히 즐겁기도 했는데, 그 정도를 넘어서니 이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상담을 해 보니 담임도 딸 아이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말은 부드럽게 하는데 뒤에 숨은 뜻이 아리송하다.

집에 돌아와 슬쩍 고삐를 죄어본다. 아이는 따라오지 않으려고 반항을 한다. 왜 무엇이든지 어른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느냐고 팽팽하게 맞선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면 안 된다. 말뚝을 안방으로 옮겨 남편 보라는 듯이 쾅쾅 박는다. ‘아버지가 그렇게 맨 날 오냐, 오냐 하니까 아이가 저 모양이지.’ 팽 돌아눕는다.

안방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걸 눈치 챘는지, 아이는 며칠간은 자제하는 것 같더니 일주일을 못 넘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그새 말뚝이 느슨해졌나 보다.

모르긴 해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여름이면 긴 밧줄이 달린 말뚝을 들고 산으로 소먹이를 찾아 나갔던 때를 떠올리며 고삐의 길이를 다소 늦춘다.

무서운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풀어준 것이 아이를 방목한 게 되었던가 보다. 중학교 때 담임은 엄마가 선생님이라기에 좀 의외였다는 말을 했다. 슬리퍼를 자른다거나 말이 지나쳐 나름대론 선생이 선생 때문에 열 받는 시기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엄마도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대화를 하다보니 딸아이의 말투가 여간 당돌한 게 아니다. 이런 태도를 담임께 보였다면 열 받을 만도 하겠다 싶다.

코뚜레를 만들기 위해선 뻣뻣한 나뭇가지를 둥글게 휘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휘려고 하면 부러지고 만다.

적당한 열을 가한 후에 끝 부분을 한 데 모아 묶어둬야 모양이 둥글게 고정된다. 그래서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 앞에서 아버지는 나무를 불에 달구었던 것이다.

송아지가 예쁘다고 마냥 코뚜레를 꿰지 않고 방목해서 키울 순 없다. 어느 시기가 되면 코뚜레를 끼우고, 어느 정도 크면 어미 소를 떠나가지 않던가?

딸아이가 엄마랑 같이 있을 시간이래야 앞으로 몇 년이 남아있을까? 생각하며 화를 누른다. ‘그래. 같이 있을 때가 좋지.’ 하루에도 머리에 뿔이 서너 개씩 돋는 걸 꾹꾹 참는다. 엄마 노릇도 참말 어렵다. 저 아이가 엄마의 말뚝을 벗어날 땐 들일을 나간 어미 소처럼 제 할 일을 하느라 또 어느 말뚝엔가 보이지 않는 고삐에 묶여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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