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복경산고 교사·교육학 박사

2006년 스승의 날은 유난히도 말들이 많아 학생을 학교에 출입금지 시키고 교사들은 자가연수원을 내고 집에서 연수를 했다.

어느 저명인사는 ‘스승’이라는 용어가 혐오스러우니 사용을 자제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교원단체에서 교사의 명예훼손이라고 소송을 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이든, 교사든, 노동자든, 지식전달 기능사든 왜 이렇게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에 연연하는 분위기로 스승의 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우리사회가 교직에 대한 인식의 근저에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없는지 다 함께 지혜를 모아야 될 것이다.

교사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동양과 서양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동양적인 사고의 교사관은 교사의 조상이 성현들일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 임금이 백성을 권능과 사랑을 바탕으로 다스리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자애를 바탕으로 하되 엄격하게 훈육하는 것, 이 양자를 교사는 모두 갖추어서 학생을 지도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설령 교사의 인격이 그렇게 보기에는 다소 미흡하더라도 교육을 위해서 이를 묵인하는 것이 사회의 미덕으로 생각해 왔으나 현실은 이러한 권위와 사랑이 의심을 받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질책의 대상으로 교사의 인격이 매도되는 현실에 있다.

이에 반해 서양적인 사고의 교사관은 희랍시대의 파이다고고스(paidagogs)가 그 조상일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희랍시대에 파이다고고스는 상전의 자식이 학교에 오고가는 것을 수발하고 도와주는 노예로 노예 가운데서도 상전의 얼굴 한 번 보기도 힘이든 끗발이란 전혀 없는 노예였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다치면 ‘파이다고고스도 못 해먹겠구나’하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이 파이다고고스가 어원이 된 것이 피다고지(pedagoggy)이다. 즉 교육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교육이나 교사에 대한 인식은 동양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출발했다.

그래서 미국의 서부 개척사에 보면 증기선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면서 여기에 교사가 몇 명 있으니 자녀교육에 필요한 사람은 돈을 내고 데려가라고 외쳐댔다. 교사가 하나의 상품으로 노예의 자손다운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교사출신이 당선되자 교사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기이한 생각이 퍼지게 되고 급기야 교사들 스스로가 자존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헌장도 생겨났다.

스승의 날이 유래 없이 시끄러운 요즈음 교사에 대한 이러한 양극적인 사고가 동양의 조그마한 대한민국에서 만나 서로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묘한 생각이 든다.

문제는 우리의 희망인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다는데 있다.

어느 한쪽의 교사관에 일방적인 손을 들기보다는 이 양자의 교사관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과 앞날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 보는 것이 어떨까?

교사는 없고 교육만 있는 사회를 건설하길 바란다면 할 말이 없지만, 교사를 필요로 하는 교육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교사 없는 교육만을 바라는 사람들의 있는 한 스승의 날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내년에는 뜻 있는 스승의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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