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영 선<경주초등 교사>

봄이 되면서 베란다의 양파 자루가 수상하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싹을 내민다. 모양새가 파처럼 생긴 게 잘도 자란다. 이름에도 ‘파’자가 들어가 있으니 파가 맞긴 맞다. 알토란처럼 볼록하던 양파가 하루가 다르게 홀쭉해진다. 낙타가 물을 저장하듯이 양분을 저장해 둔 양파의 저장창고에서 지금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물 한 모금 안 먹고도 제 몸의 물기를 말려가며 싹을 내미는 기세가 맹렬하다.

양파에게서 모성이 느껴진다. 입덧을 하는 새댁처럼 보기가 애처롭다. 양파는 무엇엔가 몰입해 있는 듯하다. 생존본능이랄까? 달력을 걸어놓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계절을 알아차리고 저렇듯 맹렬하게 대를 이어가려 하는 것일까? 조금만 방심하면 양파 자루에서 진물이 흐르고 썩는 냄새까지 난다. 베란다에 갇혀 있지만 들판에서 양파가 추위를 이기고 파랗게 싹을 내는 시기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다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듯하다. 때를 알아차리는 것은 양파만이 아니다. 비닐 포대 속의 무는 바람난 처녀처럼 속에 바람이 들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해마다 단속을 해도 봄이 되면 속수무책이다. 노릇노릇 싹을 내미는가 하면 어느새 푸른 순으로 바뀌면서 몸이 쭈글쭈글해진다. 갈 때를 알아챈 것처럼 바깥 날씨가 풀리기가 무섭게 가속도가 붙는다. 뼈 속에 바람구멍이 숭숭 뚫린 게 질기고 맛이 없다. 흙냄새까지 난다.

우리네 삶도 자연의 순환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자식들 짝을 맺어주고 나면 할 일을 다 한 듯 홀가분하다는 얘기를 한다. 손자라도 볼 양이면 대를 건너 뛴 그 사랑이 또한 끔찍할 정도로 눈물겹다. 자식에게 쏟아 붓던 사랑 그 이상이다. 할아버지 소리 듣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한다. 손자들 노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이 봄 햇살처럼 따사롭다.

거꾸로 가는 시계는 없는지 아무리 화려한 성장을 하여도 세월은 가릴 수가 없다. 태어나는 것도 늙는 것도 순간이란 생각이 든다. 정지한 듯 고요하지만 안으론 태엽이 쉴새 없이 감기고 있다는 것을 때론 잊어버리고 산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까운 것들이 흐릿해지며 초점이 맞지 않는다. 책을 읽을때도 안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가 제 몸 속에 태엽을 감고 있나보다. 때맞춰 누가 호명이라도 하는 듯 풀꽃이 피어나고, 나무가 응답하듯 순을 내민다. 봄비가 다녀간 뒤엔 모두가 대문을 열고 부지런히 봄맞이를 한다. 마른 검불 속에서도 봄빛이 새나오고, 아무 것도 없는 듯 텅 빈 들판에도 아지랑이가 아물거리고 새 생명이 꿈틀거린다. 엄동설한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는 생명력을 보인다. 초목들이 추위를 견디어내는 강인함이 덩치 큰 사람보다 강하다.

양파를 까며 내 마음이 몇 겹인지를 생각해본다. 무미건조한 양파의 속이 덤덤히 꾸려지는 일상생활 같다. 양파는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전부를 다 내보여주는 것 같다가도 때론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같기도 하다. 까고 또 까도 그 속이 똑 같고, 무엇인가 들어있을 것 같은데 다 벗겨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찔끔 눈물을 짜내게 만드는 그 무엇이 들어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뭔가 특별한 일이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하루가 열리었다가는 또 닫힌다. 그런 일상 속에 자잘한 즐거움이 양파처럼 감칠맛을 내고 텁텁함을 덜어준다. 된장찌개 속의 양파처럼 나 또한 어딘가 스며들어 있는 듯 없는 듯 맛을 내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어제처럼 또 밍밍하게 하루가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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