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이라크전쟁 파병 문제이다. 전세로 보아서는 거의 전쟁이 끝나 가는 마당인 듯한데 방송에서는 특별 취재 혹은 토론 등으로 이미 파병으로 결정된 문제를 되새김하고 있고, 시민단체에서는 파병에 찬성한 국회의원의 낙천·낙선운동을 벌이겠다며 나서고 있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 문제를 한층 더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국회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내는데 찬성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 하는 문제가 깔려 있고, 이 문제를 더 천착해 들어가면 미국이 이라크에 대하여 전쟁을 감행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따라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 문제는 세 겹의 문제가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먼저 시민단체가 낙천·낙선운동을 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이다. 법적으로는 낙선운동이 불법이 아니라고 하니 그 정당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활동 범주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다면 비민주적이며 비인간적인 정치의 횡포를 또 다른 비민주적이며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제어하는 것이 될 뿐이다.
시민단체는 자기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고 정의로우며 모든 시민들은 자기들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또 시민들의 수준은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아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단이다. 사실 인간은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근시안적인 존재이다.
시민단체가 토론에 나와 지적하는 사항들을 위정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점이 많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어디까지나 문제가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쳐야지 누구를 낙선시켜야 한다고 가르치려 한다면 이는 자신들이 수준 있다고 믿고 있는 시민을 거꾸로 바보 취급하는 아이러니를 만드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 미국이 유엔의 결의도 없이 영국과 연합하여 이라크를 공격한 점에 대해서는 반전운동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거나 우리 나라의 여론을 보거나 그렇게 훌륭한 결정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이 이번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와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히 다르다. 이들 서방 선진국이 이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아마 중동지역의 패권 다툼에서 미국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 다음으로 북한을 공격한다면 그것을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좌시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미국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나에게 성질이 괴팍한 동생이 하나 있다고 하자. 동생은 자신의 생활도 엉망이거니와 가정에 들어오면 부부싸움에다가 애들을 두들겨 패기만 한다고 할 때, 형은 동생을 가만히 놓아두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동생이 정신을 차리도록 조치를 하고, 동생의 집안을 정상적인 가정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형이 동생 집의 살림을 반쯤 살아 준다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동생 집안을 너무 간섭한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제수나 조카들이 나의 간섭을 더 싫어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정의 평화가 모든 생활의 기본이 된다는 보편적인 가치를 나의 희생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면 이는 모든 이에게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미국이 해방군이 될 수도 있고 점령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예를 든 내 동생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짓밟는 통치자는 있어 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통치자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서는 왜 일언반구 없는지 그 점은 매우 의아스럽다.
국회에서 파병 안이 찬반에 붙여졌을 때, 분명 이점에 고민하지 않은 국회의원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실명으로 투표하는 마당에 그들도 많이 고심했을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많은 문제가 걸려 있다. 파병 찬성에 표를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이를 꼬투리 삼아 시민단체가 낙선운동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은 미국에 대하여 우리는 약자라는 것이다. 아니, 미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국제관계에서는 힘만이 정의이다. 이 경우 약자의 비굴함은 신도 용서하신다.

하 태 후<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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