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4·19혁명이 43주년을 맞는다.
나라와 겨레의 바른 진운을 개척코자 울부짖던 그 함성과 이념은 해를 거듭할수록 퇴색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늘 뜻깊은 기념일을 맞아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희생된 민주영령들의 명복을 빌면서 4·19의 실상을 살피고, 그 역사적 의미와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4·19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사회적 혼돈이 3·15 부정선거로 극에 달하자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에 맞서 분연히 궐기한 데서 비롯되어 2·28 대구 학생시위, 3·15 마산의거, 4·18 고대생 반독재투쟁으로 촉발되었다.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강압적인 진압에 격분한 서울의 10만여 학생과 시민들이 궐기하여 아침부터 국회의사당과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무대로 진출한 학생 시위대들이 경찰의 총격으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피의 4·19 혁명은 본격화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날 전국적으로 희생된 사망자는 186명, 부상자는 6천26명이나 되었다. 다급한 정부가 이날 오후 비상계엄령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선포하고, 시위군중은 4월 20일 계엄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러나 타도시에서 학생시위가 계속되어 그 열기가 수그러지지 않고, 이어진 정치적 소용돌이로 이승만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4월 25일 오후 제자들의 엄청난 희생을 지켜본 교수 258명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골자로 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바로 거리로 나와 침묵시위를 하자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하였다. 이를 계기로 4월 26일 오전에도 시위 인파는 계엄군의 해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만 이상으로 늘어나고, 이대통령의 하야 요구가 빗발치자 결국 10시 30분 하야성명이 발표되었다.
4·19로 독재정권은 물러났지만 혁명의 주체세력이 직접 정권을 잡지 못함으로써 민주주의정책과 평화통일정책을 중심으로 한 혁명과업을 수행할 수 없었고, 민주당 장면정권까지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마침내 5·16 군사쿠테타(1960년)의 구실을 주고 말았다. 그러나 4·19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적 의의는 크다
첫째, 4·19혁명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 중의 하나로 순수한 학생들이 민주혁명을 주도하여 위대한 시민혁명으로 발전시킨 민권의 승리였다. 둘째, 4·19혁명은 민족정기의 계승 발현이었다. 4·19정신은 원천적으로 조선 후기 진주민란의 부정항거, 동학혁명과 개혁운동, 만민공동회의 혁신운동, 일제강점하의 3·1운동 등에 뿌리를 둔 민중의 저항의식에서 그 맥락을 이어받은 것이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는 4·19정신이 발전적으로 계승되어 지속적인 실현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 신장을 위한 정치개혁,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사회정의 실현, 나라사랑·인권존중·상생의 삶을 위한 교육 등을 발전적으로 이루어내는 국민 일체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 이념과 정신을 되살리는 노력은 당시 산화한 민주영령들이 후손에게 남긴 엄숙한 국민적 책무며 국민적 과제다.
지금도 생생한 학생들의 지축을 흔든 그날의 함성과 포효는 반독재투쟁의 활화산이요 한국민주주의 횃불로서 온 국민의 마음을 일깨워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민주 태양이 되어 영원히 빛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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