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학위 논문은 50만원, 석사학위 논문은 300만원, 박사학위 논문은 500만원에 대필하여 무사히 학위 심사를 통과하여 학위를 받았고 더욱이 그러한 수요자의 요구에 응하여 불법 행위를 자행하는 기업형 조직까지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남으로써 우리나라 학위에 대한 깊은 불신의 풍조를 낳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자 학위를 취득한 자와 대필한 자에 대한 처벌 운운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은 없어 보이고, 더욱이 지나간 문제보다는 금후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에 접근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일본인 교수가 하루는 나에게 매우 이상하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하군, 한국 유학생들은 왜 학위에 저렇게 매달리고 또 왜 저렇게 학위를 달라고 야단인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쓴 논문을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을 알텐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학위’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 대학교수다. 대학교수 초빙공고를 한번 보자. 박사학위는 기본요건으로 박사학위가 없으면 서류를 접수시킬 수도 없다. 실무를 표방하는 대학이든 아니든 관계없다. 아니 전문대학에서도 이를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우선 서류라도 꾸미고 보자는 생각으로 논문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학위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와 같이 실력이 아닌 학력을 중히 여기는 사회에서 학위는 어쩌면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신분증 정도가 아니라 그 위력을소총에 비유하자면 핵폭탄에 가까운 정도라고 할까.
사회가 급격히 근대화되면서 우리 나라 물가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에 못지 않은 것이 학위 인플레이션이다. 급격한 학위 인플레이션이 일다 보니 여기에 뒤쳐지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직장 생활에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일이면 일, 공부면 공부지,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한한다. 이렇다 보니 자연히 논문은 대필을 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어 있다.
세계의 유수한 박사나 대학교수를 제치고 작년에 평범한 회사원인 다나카 고이치씨가 노벨 화학상을 탄 것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시사해 주는 바가 너무나 크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박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하는 자성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박사 질은 어떠한가를 되묻게도 한다.
대필이라도 좋으니 학위를 가지겠다는 생각은 마치 속은 어떠하든 세계 명품브랜드로 몸치장을 하고 다니는 꼴사나운 유한마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라는 좁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데 가는 곳마다 대형차들이 넘쳐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학군 좋은 데서 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위장전입까지 하는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모정과도 다르지 않다. 미국의 무슨무슨 명문대학을 다녔다고 학교 이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 그것은 멀리 조선조 말엽에 족보를 사고 파는 것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학위 대필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껍데기 문화 숭상의 일각일 뿐이다. 우리는 사실 껍데기 문화 속에 빠져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선진 사회를 이룩하자면 이 껍데기 문화 혹은 과시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실의 여하에 의해 평가받는 사회가 되지 않고는 선진국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이런 껍데기 문화에 대하여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비록 학위의 대필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다른 문제는 언제나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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