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한 외과의사인 반 아이크 박사가 그랜드 폴스 병원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밤 병원으로부터 긴급하게 호출을 받았다. 야간에 승용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중 거리에서 한 괴한에게 차를 강탈당하게 된다.
마음이야 다급하지만 차편이 없어 한참을 걸어서야 병원에 도착해보니 자신이 돌보아야 할 환자는 조금 전에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아직 꿈도 피워보지 못한 어린이였다. 그런데 그 옆에서 통곡을 하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아이크 박사 자신의 자동차를 강탈해간 그 괴한이었단다.
아이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급한 나머지 자신의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가던 박사를 몰라보고 총으로 위협까지 해서 자동차를 강탈하고는 자신이 먼저 병원으로 달려간 것이다. 결국 자신의 행동이 결국 아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걸 알아차리기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대구소방본부에서 발표한 2002년도 소방활동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119구조대 출동건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구에는 6개의 소방서마다 119구조대가 설치되어 86명의 대원들이 2교대 근무를 하면서 지난 한해동안 화재와 교통사고를 포함한 크고 작은 사고로 5,030건이나 출동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중에 교통사고 현장출동은 703건인데 문 개방 출동건수는 무려 443건이나 된다. 다시 말해서 10번을 교통사고현장에 출동한다면 아파트나 주택의 현관문이 잠겼으니 119 구조대가 출동해서 문을 열어 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건수가 6건이 넘었다는 것이다.
구조대가 안전조치를 취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 인근 열쇠점에 연락하여도 충분히 조치할 수 있는 “단순 문 개방”이지만 열쇠집 출장비를 아끼기 위해 119를 부르는 것이다.
또한 술에 만취한 시민이나 노숙자와 같이 비응급환자를 이송하기 위한 구급대의 출동도 연간 3천여 건에 이르고, 지난해 119신고전화 58만건 중 약 7만8천건은 장난전화였지만 이중에 30%정도는 소방차가 현장출동까지 한 경우여서 소방행정력의 낭비가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위급한 상황이 아니거나 장난전화로 119가 출동함으로 인해 더 위급한 사고나 실제화재가 발생해도 구조나 구급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화재진압출동이 지연되는 경우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열쇠 수리공을 부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내 집 문을 열어달라고, 소방차가 몇 분만에 출동하는지 내기를 하느라 장난전화로 119를 불렀을 때 내 가족이나 내 친구가, 아니면 이웃의 누군가가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서 애타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면 어떡하겠는가?
알코올중독증세가 있어 술만 취하면 구급차로 집이나 병원에 대려다 달라고 전화를 해서 소방서의 단골고객(?)이 되어 버린 어느 시민도 반 아이크 박사의 실화를 생각한다면 골치 아픈 상습 신고자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가 언젠가는 내게 다시 돌아온다는 간단한 진리를 생각한다면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라고 항변하며 사소한 일에도 119를 부르는 부끄러운 시민의식이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최 영 상 - 대구보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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