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20년간 장님으로 살아오던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두 눈을 뜨게 되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가려하니, 대문이 똑같고 골목도 복잡해서 자기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길에서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이 사람에게 처방이 내려졌다. 다시 너의 눈을 감아라.”
재미있는 우화이다.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환경이나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상황에 바뀌면 혼란스러워 한다. 사람들은 이전에 살던 집을 떠나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어도 가구 위치나, 심지어 옷걸이 하나 조차도 복사판 같이 진열하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생활 습관이 편하기 때문이다. 장님이 눈을 뜬 것은 대단히 축하할 일이다. 그러함에도 정작 본인은 혼란스러운 것이다. 지금까지 두 눈 감고도 자기 집을 잘 찾아 다녔었는데 눈을 뜨고 나서 오히려 자기 집을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눈을 감고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눈을 떠 보려고 안달하고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러 사는 것이 행복일 수 있을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눈을 떠보려고 한다. 눈을 뜨는 것만이 행복인 줄 알고…눈을 뜨고 난 이후에 자기가 살아온 자리조차도 찾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체…
텔레비전에는 카지노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버젓이 공중파를 타고 우리의 안방에 들어오고 있고, 온갖 종류의 복권이 길거리의 가판대를 휩쓸고 있다.
요즈음은 <로또 복권>의 열풍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일확천금에 대한 기대감과 꿈에 부푼 사람들이 밤잠을 설치면서 대박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고 있다. 모두가 눈을 뜨고자 하는 발버둥이다.
눈을 뜨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램이다. 거액을 들여서라도 눈을 뜰 수 있다면 눈을 떠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 사람들의 세상은 이렇게도 불안할까? 왜 이리도 어수선해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눈을 감고 사는 것 보다 눈을 뜨고 살아갈 수 있다면 분명히 좋은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눈을 떴을 때이다. 정작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삶의 과정과 목표를 알 수 있느냐? 이다. 어느 날 불현듯 눈을 떴을 때,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눈 앞의 환경과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이다. 눈을 감고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눈을 뜬 후에도 유지할 수 있느냐? 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내일에 대한 꿈이나 소망을 접어버리자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마음의 눈이 닫히면 육체의 눈은 뜨나마나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니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경계이다. 눈을 뜨자 말자 정말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장님이 되어버린 장님과, 세상 욕심에 대하여 장님이 되고서야 마음의 눈을 뜬 장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작금의 사회적 흐름으로 볼 때 사람들은 눈 떪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그 이전도 이후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불행이다.
이런 현상을 놓고 눈뜬장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눈뜨고 장님으로 살 바에는 눈감은 장님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일찍이 삶의 賢者현자들은 눈뜬장님들에 대해서 책망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그 미련함에 대해 책망했다.
좋은 것은 정작 눈을 감고도 보는 것이다. 언제쯤 우리들의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마음의 눈뜬 정상인이 되어 영육의 세계를 아름답고 순수하게, 그리고 바르게 보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까? 자신이 가진 소유의 량과 상관없이 모두가 마음의 눈을 떠서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런 날을 소망해 본다.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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