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영화 두 편을 감상했는데 ‘복수’에 대한 주제의 영화였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Once upon a time in Mexico) 와 킬빌(Kill Bill) 이 그 영화들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는 사랑하는 아내를 살해한 사람을 향한 복수극이고, 킬빌은 결혼식장에서 죽임을 당할 뻔한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여인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향한 복수의 칼을 겨누는 영화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죽인 사람, 그리고 신성한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배속에 들어있던 아이마저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을 향해 복수심을 가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라고 동정할 만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복수의 끝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를 힘들게 하고, 가정을 파탄나게 하고, 행복을 짓밟은 사람들을 향해 복수를 한다면 어느 정도의 수준과 기준에 의거하여 복수를 해야만 직성을 풀릴 수 있을까?
괴롭힌 사람을 향해 총과 칼로서 복수를 했다고 하자, 과연 그 마음의 상처까지도 아물어지고 치유가 될 수있을까? 영화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 복수는 끝이 없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총과 칼로서 복수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승리를 쟁취해 낸다. 관객들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줄만큼 통쾌하게 복수의 마무리를 짓는다. 죽은 자를 위해서, 잃어버린 행복을 위해서 성실하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영화가 막을 내리고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는데도 정작 영화 속의 주인공의 모습은 허무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뒷모습들이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영상 가득 묻어나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원수를 갚았다고 소리치고, 떠들고 웃으며 파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원수를 갚은 사람들의 표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는 알게 모르게 복수심을 불태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적에 대해 보복을 하려하고, 기업인들은 상대 기업에 대해 보복을 하려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다.
복수는 인간의 역사고, 인간의 역사는 보복의 역사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지구상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테러의 위협도, 그리고 테러에 응징하겠다는 것도 아직도 보복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서 원수 갚는 보복의 주인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는 결코 감내해 낼 수 없는 보복의 지침을 우리들에게 주셨던 것이다. 보복의 자리에 보복의 원리가 아닌 사랑의 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그 분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원수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사람이 이 땅에서 태어나 한 평생을 살다보면 어찌 마음에 맺힌 사람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공연히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나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모함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워하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람 사는 세상 별 것 없다. 그러다보면 보복심이 생겨날 수도 있고, 나아가서 ‘어디 두고 보자’라는 독한 마음도 먹을 수도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인 멕시코’나 ‘킬빌’은 결코 성공한 복수가 아니다.
그 복수의 끝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 진정한 복수는 주인공의 얼굴에서 밝은 태양 빛이 발산될 때이다. 그때서야 복수를 제대로 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총과 칼에 피를 묻히는 방식의 복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얼굴에 더 무거운 그림자만 만들 뿐이다. 진정으로 승리하려면 사랑하는 방법뿐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의 얼굴에 밝음을 주고 미소를 주기 때문이다.
복수의 끝은 상대방을 품에 안고 사랑하는 것이다. 또 다시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가슴에 품어주는 것이다. 진정한 복수의 방법은 사랑뿐이다. 사랑이 차고 넘칠 때 인간의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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