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다리’라는 단어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고 말았다. 어릴 적, 개울을 건널 때의 돌다리나, 마을마다 한 두 개쯤은 있어왔던 나무로 만든 다리들, 소박하고 정겨움을 물씬 풍겨나게 해 주었던 것이 다리들이다. 그러한 다리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다리’보다는 ‘교량(橋樑)’이라는 말이 훨씬 더 친근감 있게 우리들에게 들려지고 있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교량,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교량은 더 이상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다리가 아니다. 다리의 상실은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늘 날 우리 사회에도 거대한 교량 같은 사람들은 존재해도 정녕 소박하고 정겨운 다리 같은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든 것 같다. 아니 모두가 다리보다는 거대한 교량이 되고자 안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일전에 우리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안 방에 그대로 방치해 둔 채로 6개월을 함께 지내온 어느 중3 학생의 소식이 그것이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문득 우리들 사이에 그나마 남아 있었던 다리마저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 이 소식을 접했을 때는, 가끔씩 들어온 바대로 이상한 종교 집단에 속한, 그래서 영생을 꿈꾸는 허황된 종교집단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죽은 줄을 알았지만 차마 누구에게 알릴 곳이 없었다고 풀 죽어 말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고, 죽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는 그의 말은 차라리 무지함 그 자체였다.
중3이라면 철없는 어린아이도 아닐 텐데 그의 말은 차마 철없는 어린아이가 세상을 향해 쏟아내는 절규로 들려왔다.
현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해야 할 다리가 단절된 시대라고 여겨진다. 가는 곳곳마다 거대한 교량 공사 현장처럼 텔레비전에 비치는 얼굴들은 모두가 거대한 교량의 꿈을 꿈꾸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교량 공사가 어디까지 진척되어 왔는지에 대한 소개 일색이다.
어쩌다 소박한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신문이나 방송의 가십거리 정도에 불과하다. 심지어 학생들조차도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보도되고 있다. 학생들은 함께 공부하는 급우들조차 친구가 아닌 자신의 경쟁자로 보고 있다고 한다. 함께 협동협조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다. 서로를 짓밟아야 생존할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OECD국가 중 우리나라 학생들이 서로를 향한 경쟁심이 가장 강하다는 보도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 거대한 교량만 만들려고 하는 부모들과 사회의 영향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다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본의 미치코 황후가 쓴 ‘다리를 놓으세요’라는 책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황후의 독서 추억록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린 시절의 독서의 필요성과 유익을 교훈해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과 주위 사이에 하나 씩 하나 씩 다리를 놓으면서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를 깊이 다져나가고 그것을 자신의 세계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 다리가 놓이지 않거나 놓였더라도 다리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거나 때로 다리를 놓을 의지를 상실 했을 때 사람은 고립되고 평화를 잃게 됩니다.
이 다리는 밖으로만이 아니라 안으로도 향하여 나와 내 안의 나 사이에도 끊임없이 계속 놓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립해 나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다리가 그리운 시절이고, 필요할 때이다. 모두가 외로움 속으로 침잠해가고, 자신이 만든 섬 안으로 안주해 들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를 향해 다리가 되고, 또 누군가가 삶의 강물을 건널 수 있도록 내 자신이 다리를 만들어 준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사람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한 해의 막바지에 다른 누군가를 외롭게 하는 사람보다는 누군가에게 다리가 되어 외로운 사람 하나쯤 가슴에 품어줌이 어떨까?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