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새 달력이 배달되었다. 한 장남은 헌 달력 위에 새 달력을 겹쳐서 걸어두었다. 새해가 되면 헌 달력은 뜯겨 나가고 새 달력이 그 자리에서 주인행세를 하게되리라. 아직은 주인이건만 궁색해 보이는 헌 달력 위에서 새 달력이 군림하듯 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으스대면서 새해를 맞이하려는 듯.
무심코 새 달력의 겉장에 찍힌 새해의 이름을 보았다. 갑신년이었다.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다. 지금껏 누가 나이를 물어올 때면 갑신생(甲申生)이라고 대답했으니 귀에 익고 입에 익을 수밖에. 귀와 입으로는 익었지만 눈에는 생소했으니 갑신년이라고 찍힌 달력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태어나던 해인 갑신년이 다시 돌아 왔고 어언 간에 환갑이란 나이가 되었다. 어쩐지 찜찜하고 달력을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지난 일요일, 성당에서의 광고였다. ○○식당 주인이 점심 식사를 제공하므로 육십 세 이상 되는 분은 그리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 문을 빠져나오는데 어느 친지 가 왜 뒤꽁무니를 빼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바쁘다고 얼버무렸지만 아직은 그 대열에 끼이고 싶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누구는 나이를 물으면 꼭 만(滿) 나이를 가르쳐준다고 하였다. 한 살이라도 깎고 보자는 속셈이리라. 사십대를 졸업하기가 아쉬워 생년월일까지 따져 계산한 나이로 사십구세를 고집하면서 몇 년 동안 사십대 행세를 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버티어도 시간은 흘러가고 흐르는 세월 따라 세상도 사람도 변해간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 들고 세월을 막아본들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달려온다.
변화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세상 만물이 변하지 않는 상태를 생각해보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변화를 허용하신 신의 권능에 감사하고 그 물결에 순응하며 나와 관련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리자. 변하게 하는 것이 하늘의 몫이라면 아름다움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몫이다.
주어진 나이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으로 가꾸자. 왕성했던 도전력과 저돌성은 차츰 조정력과 자제력으로 대체하자.
강속구 중심을 제구력 중심으로 바꾸고 젊은 시절의 신선미를 완숙미로 꽃 피우자. 진지한 자세로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에게 신은 아름다움을 선사할 것이요, 무모한 욕심이나 허황한 변모를 꿈꾸는 사람에겐 징벌을 내릴 것이다.
동갑내기 부부가 육십회의 생일을 맞이하였다. 하느님께서 축하하면서 한 가지의 소망을 물어보았더니, 그 남편은 자기보다 삼십년 더 젊은 부인과 살고 싶다고 했다.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겠으니 하루만 기다리라고 했다. 기대를 걸고 이튿날 깨어보니 부인은 그대로 있고 남편은 구십세의 노인이 되어있었다. 어느 책에서 본 우화의 한 도막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마음의 변화다. 사람의 마음은 외모와 같이 쉬 변하지 않는다. 백발을 하고서도 마음은 청춘인 것이 사람이다.
마음 속에 열정의 불씨만은 생명이 다 하는 날 까지 사그라지지 않도록 노력하자. 변화의 물결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람에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라는 시를 통하여 이렇게 외쳤다. ‘그것은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강인한 육신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참신함을 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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