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계백장군이 주인공인 영화를 관람했다. 그 영화를 관람하면서 시종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영화를 아주 성실? 하게 관람했다. 영화 중에 흐르는 키워드가 ‘거시기’라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시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 전체를 놓쳐버리겠다는 위기감 때문에 거시기를 이해하려고 엄청 집중했었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영화를 만든 감독의 메시지보다도 이상한? 말 한 마디로도 영화가 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시기라는 말을 반복 사용하게 함으로 관객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반대급부로 영화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감독의 대단한 능력이라고 여겨졌다. 나는 그런 영화를 보았다. ‘거시기’라는 영화....아직도 거시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영화 감상에 실패한 영화 관객이 되어있다.
말(言)이란 관계지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시대든지 말이 통하지 않은 시대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과 다툼이 발생했었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어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을 평가할 때 <저 사람 나하고 말이 통하네...> 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곤 한다. 심지어 외국 사람과의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서 외국어를 배운다. 관계 지향적이지 못한 언어는 독백일 수밖에 없다.
근간에 우리 주변에는 언어의 이질감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미 세대간에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한 집에서 자녀들의 언어와 부모들의 언어가 다르고, 학교에서도 교사와 학생들 간의 언어 이질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른들과 청소년들과의 언어 이질현상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좁은 땅 덩어리 안에 함께 살아도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서로에게 전달될 때는 ‘거시기’로 들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거시기가 무엇이냐? 고 물어보지만 ‘거시기가 거시기지 뭐냐’라는 답변이 돌아 올 뿐이다. 거시기가 언어의 세상을 정복해 버린 듯하다.
동물이나 곤충들에게도 언어가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질문 중 하나다. 서울대 최재천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에 보면 벌들의 언어에 대해서 소개되고 있다. 벌들은 춤을 상징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며 서로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아침나절 꿀을 찾아 나섰던 정찰벌들이 돌아오면 제각기 춤을 추며 동료들에게 꿀 있는 곳을 알려 준다. 그들은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과 같은 모습의 이른바 ‘꼬리춤’을 춘다. 집에서 기다리던 벌들은 이런 정찰벌들을 대여섯 번쯤 따라 다닌 후 벌집을 떠나 정찰벌이 얘기해 준 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찾아간다. 바로 꼬리춤 속에, 더 정확히 말하면 꼬리춤에서도 특히 직진춤 부분에 방향과 거리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미물들도 그들의 생존과 공존을 위해서는 거시기라는 애매하고 정체불명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고 표현이 분명한 언어를 구사한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언어 때문에 세대간에 갈등이 표출되고, 사회 구성원들 간에 혼란이 생기고, 거시기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무리를 만들고 세력을 만든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두워 질 수밖에 없다. 좀더 밝고 아름다운 말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관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거시기가 아니라 ‘사랑, 평화, 행복, 기쁨, 즐거움, 위로, 용기, 미안, 고마움’등 삶에 행복을 주는 언어들이 구체화되어 상대방에 전달되는 그런 사람들이면 좋겠다.
아직도 영화 속에서 ‘거시기 작전’이 무엇인지 몰라 책사들을 불러 모아 놓고 거시기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라고 닥달하던 김유신 장군의 혼란스러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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