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밤, 아버지들과 함께 하는 독서 모임에서 어느 분이 일본 사람 요로다케시가 쓴 ‘바보의 벽’이라는 책을 읽고 와서 발표하였다. 제목이 흥미가 있어 관심 있게 들었다. ‘바보의 벽’이라는 것은 고정관념 혹은 고정된 지식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요즈음은 ‘바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서점 진열대에는 ‘바보는…’ 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는 책들이 많아 눈에 쉽게 들어온다. 또한 대중가요 중에도 ‘바보’가 제목이 되어 나오는 노래가 한 두곡이 아니다.
왜 오늘 우리 시대에 ‘바보’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전자의 아버지가 소개해 준 ‘바보’의 의미와 대중가요가 던져주는 ‘바보’의 메시지는 전혀 다르다. 한 쪽은 자기 틀 속에 갇혀 있어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라면, 대중가요에서 말하는 바보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점에 책 제목으로 나오는 바보는 실천과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고 생각만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어찌되었던 <바보>라는 말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어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작금의 우리 사회에는 막혀지고 답답한 일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보의 기준이 무엇일까? 정상인과 바보의 차이는 무엇일까? 라고 질문한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정상인의 기준이 무엇인가? 의 질문이 풀리지 않으면 결국 바보는 없어진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자신을 정상인이라고 착각하고 상대방을 바보로 매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고, 지금도 그와 같이 바보 만들기가 사회 요소 요소마다 일어나고 있음에 못내 마음이 안타깝고 초조해진다.
역사적으로 바보를 만들겠다고 작심한 세력들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사회는 병들고 아팠던 기억이 난다. 총칼로 당하는 아픔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바보들이 많아지는 사회는 분명 아픔만 낳았던 것을 기억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자 작심한 세력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회는 분명 아픔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바보는 정작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을 바보로 보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바보의 눈에는 정상인들이 꼴불견의 존재로 보여 진다. 기어이 해치워 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만 바보들이 춤추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아버지가 <바보의 벽>이라는 책을 소개할 때 가슴이 무척 답답해 옴을 느꼈다. 지금 내 자신을 비롯해서 우리 모두는 바보의 벽 속에 갇혀있는, 그래서 정작 자신이 바보인줄 모르고 오히려 벽 외부에 있는 자신 외에 또 다른 사람들, 즉 정상인들을 향해 비웃고 히죽거리고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의 행복은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때 보다는 오히려 바보라고 생각할 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보는 부족해도 용서가 되고, 모자라도 이해가 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인은 완벽해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늘 불만이고 불평이다. 그러나 바보라고 해서 똑같은 바보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바보는 자신의 벽을 허물고 세상 밖으로 담대하게 뛰쳐나오는 사람이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한정된 지식의 틀 속에서 벗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밝게 보면서 자신의 할 일을 찾아가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치도록 덤벼드는 바로 그런 바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2의 아인슈타인이 되어야 하고, 에디슨이 되어야 하고 처칠이 되어야 한다. 그런 바보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콩이냐? 팥이냐? 따지거나 비판할 겨를이 없다. 자신의 벽을 뛰어 넘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를 포용하고 이해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벽속에 갇혀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바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고 직장의 주류가 되는 한에는 그 공동체는 어둡고 아플 수밖에 없다. 자신의 벽을 뛰어넘어 공동체에 긍정적인 그 무엇을 주기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바보들의 행진의 그 날을 그리워해 본다.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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