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었다. 기술 만능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에 걸 맞는 제목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책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을 한 것은 용서가 과연 기술로 가능한 것일까? 였다. 기술이라고 하면 이공계통의 용어가 아니던가? 예를 들어 <정리의 기술> <독서의 기술> <메모의 기술> <용서의 기술>등은 그런대로 이해가 가는 제목들이다.
그런데 반하여 <용서>라는 것은 감정에 가까운 용어가 아닌가? <용서와 기술>이라는 이 말은 서로 상충되는 의미의 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선뜻 이해를 하지 못하고 책을 펼쳤다. 과연 책 내용은 용서가 하나의 기술이라고 여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꾸며져 있었다. 그럼에도 문득 <이런 용서라면 용서 뒤에 따라오는 한 번의 손잡음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 용서의 기술에는 <느낌> 즉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되는 용서의 기술은 용서를 더 어렵게 만드는 용서의 역작용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된다. 용서라는 것은 어떤 절차나, 또는 어떤 과정이나 방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를 포용하는 것이고, 용납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기술로만 풀리지 않는 일들은 허다하다.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도 있다. 그러나 어디 사랑이 기술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칭찬의 기술>이라는 책도 있다. 아무리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한다하지만 칭찬이 어디 기술로만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사실 우리의 현실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의 문제이고 마음의 문제이다. 지적인 수준과 인간의 기술은 제2 아니 제3의 바벨탑을 쌓고도 남음이 있는 시대가 도래 했다. 미국은 화성에 로봇을 보내어 화성 탐사를 위해 바닥을 훑고 있다. 로봇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상에서 직접 현장을 보듯 한 눈에 빤히 보면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인간 복제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남성이 없이도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기술 만능시대다. 기술 산업이 수출의 효자 산업임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식의 발전에 비례해서 삭막함과 냉정함이 도처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살인사건과 자살, 그리고 정치권과 경제권이 금전적 관계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들의 소식들은 분명 현대인들이 마음을 잃어버렸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지식 경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식이 만능이 된 사회는 삶의 모든 것을 기술로 치부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으로 아우르고, 눈물로 감사주어야 할 감정적인 부분까지도 기술이라는 것으로 포장을 해 버린다면 정녕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의미의 만남과 헤어짐이 남게 되는 것일까?
마음이 없는 사회는 감동이 없는 사회이고, 마음이 없는 사회는 눈물이 없는 사회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 감동이 있는가? 눈물이 있는가? 모두가 상대방의 잘못을 캐내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에 급급해 있다. 자신의 더 큰 잘못의 덩어리를 감추기 위해 상대방의 작은 덩어리를 들추어내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슴이 없다. 감동이 없다. 눈물이 없다. 한 편의 시를 읊조려도, 한 편의 소설을 읽어도,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해도 가슴 가슴이 맞닿고, 가슴 가슴이 전해지는 찌릿한 그 무엇이 부족하다. 사방팔방으로 서로를 향해 견제하고, 비난으로만 일색 된 가슴을 잃어버린 황량한 벌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대일수록 용서도 기술도 사랑도 기술이 아닌 따뜻한 가슴으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밝아지고 아름다워질까? 이론이 아닌 삶으로, 방법이 아닌 삶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술이 아닌 감정으로 다가설 수 있다면 우리네 삶이 훨씬 더 부드럽고 윤택해지지 않을까? 열려진 마음으로 마음을 주고받을 때 용서나 칭찬, 그리고 사랑을 하기 위해 구태여 기술을 배우지 않더라도 따뜻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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