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살아있으니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또는 소의 소리도 듣고 닭의 소리도 듣는다. 그 뿐만 아니다. 붉은 꽃을 보면 붉게, 푸른 물을 보면 푸르게 느낀다. 이 웃고 울고 듣고 본다는 사실 자체는 범성(凡聖)이 다를바 없다.
오늘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도 얼마나 풍족하게 살아가느냐에 있다. 그래서 더 풍족한 삶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심지어 살생까지 한다.
원래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길이 아니라 생존하는 그 자체에 분명한 뜻을 가지고 살고 있다. 즉 삶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말씀하시기를 뜻있는 선비(어진사람)는 생을 구하려고 어진 것을 해침이 없다. 몸을 죽여서 오히려 어진 것을 이룬다. 뜻있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은 인을 해치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몸을 버리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어진 것을 구하는 것을 참된 생명으로 안다.
어느 성자는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이며 어진 것을 해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군자는 ‘도를 꾀하고 의식을 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군자는 도를 걱정하고 가난한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사람이라면 옳은 인간의 도를 밟아야지 인간의 도를 버리고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서는 안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를 바라지만 아무리 비렁뱅이 일지라도 짐승을 대하듯이 대하면 음식을 주어도 먹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짐승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군자는 “의를 분명하게 깨닫지만 소인은 이익에만 밝으니 이익을 얻음에 있어 의를 생각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은 이익을 아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의리있게 재산을 모아야지의리를 버리고 재산을 모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군자는 의롭지 아니하게 부자가 되거나 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뜬구름과 같다.
서양 철학에서도 인간에게는 이성, 실천이성, 행동하는 이성이 분명히 갖추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칸트에 의하면 “이성이란 반드시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지 다른 조건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렇듯이 참다운 사람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며 또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다른 조건을 붙여 행하지 않는다. 즉 다른 것을 바라고 행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실천이성과 양심, 규범의식 등은 참으로 인간만이 가지는고상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는데에 그 가치가 있고 사람다움이 있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다른 무엇을 요구한다면 결코 올바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양심적 생명이란 바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인간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 생명, 참다운 인간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러한 마음이 새역사를 창조하므로 역사적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운 붕
<대성사 주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