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님의 <십자가>가 라는 시詩를 떠올려 본다. “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위의 윤동주님의 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연상케 한다.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사나이는 행복해 하고 있다고 시심詩心을 말해주고 있다. 고통과 죽음에 처해질 예수가 어떻게 행복해 할 수 있었을까? 못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십자가의 사나이 즉 예수님은 행복한 존재임을 숨기지 않는다.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나이의 의도는 무엇일까? 어떻게 괴로움과 고통 앞에서 행복해 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부활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의 추위를 꽃샘추위라고 한다. 꽃샘추위는 마지막 겨울의 몸부림의 표현일 수 있다. 겨울이 다 지나갔거니 하고 방심하고 있다간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겨울이 아무리 몸부림을 친다고 할지라도 추격해 오는 봄기운에 어찌할 수 없다.
삶이란 것도 그렇다. 우리네 삶이란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기 마찬가지다. 피할 수 없는 겨울이 개인들 마다 찾아오기 마련이다. 피할 수도, 피할 길도, 방법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맞이해야 할 겨울이 있긴 마찬가지다. 예외의 인생은 없다. 추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별 없이 찾아드는 것이 겨울이다.
하지만 겨울이 제 아무리 길다 하여도 봄이 오는 길목 앞에서는 또 비켜서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인생의 순리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추위에 떨던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따사로운 봄 햇살 한 줌 비추어지는 날이 오는 법이고, 봄 햇살 마주하면서 죽었나 했던 땅 속의 미물들이 살아있음을 얼굴로 말하면서 세상에 솟아나는 법이다.
지금 삶의 주변에는 죽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것을 사람들의 대화 중에서 발견한다. 아니 하루가 멀다 하고 겨울 속에서 내일의 봄을 소망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소식들이 아침저녁으로 우울하게 만든다. 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겨울만이 보일 뿐이다. 그들은 봄이라는 것을 아득히 멀리 있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계절인줄로 치부해 버린다. 아무리 땀 흘려 노력하고, 밤낮을 모르고 일을 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의 삶을 산다면 그런 삶의 겨울 앞에서 절망할 법도 할 것이다. 수고하고 애쓴 대가를 공평하게 보상받지 못해 속상해 있음에도, 편법과 부정으로 사는 사람들의 잘난 뉴스를 듣노라면 화병이 날 법도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는 공평하게 찾아드는 봄의 계절이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비켜갈 수 없는 봄의 계절이 있다. 겨울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사람만 맞이할 수 있는 환희의 계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다수의 사람들은 괴롭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괴롭지만 행복한 삶이란 언뜻 모순의 삶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은 고해苦海를 지나는 존재들이다. 해변 언덕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살아 온 삶을 볼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오늘 하루 괴롭다고 영원히 괴로운 것은 아니다. 오늘의 괴로움을 딛고서서 내일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인생도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너무 쉽게 내일의 행복을 포기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괴롭지만 행복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의 행복한 예수님처럼...<괴롭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져 가는 그런 세상을 그리워해 본다.
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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