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네에 들렀더니 거실 한쪽에 철사로 얽은 상자 속에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아홉 살 손자가 ‘할머니, 토순이 보세요! 너무 귀여워요!’라고 하니 뒤따라 여섯 살 손녀가 ‘토순이가 물을 먹고 있어요. 예쁘지요?’하며 이구동성으로 맞장구친다. 빗장을 열자 토끼는 쏜살같이 거실을 가로질러 식탁 한 구석으로 숨는다. 손자가 비집고 들어가 끌어안고 나오며 입 맞추고 쓰다듬고 야단법석이다.
학교 앞에는 토끼 뿐 아니라 병아리랑 도마뱀, 개구리와 심지어 쥐도 판다고 한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니 곧잘 살 법하다.
우리는 어릴 적 학교 길을 오가며, 산꿩들이 푸드득 날고, 토끼들이 뜀박질하는 것을 늘상 보았다. 웅덩이나 도랑가에 맴도는 잠자리를 잡아 실로 다리를 매어 날리기도 하였으며, 풍뎅이를 뒤집어 놓고 뱅뱅 돌아가는 폼을 보며 깔깔거렸다. 마루 밑에서 누렁이가 새끼를 낳으면 꼼지락거리는 새끼를 안으려다 누렁이가 으르렁거려 혼이 난 일도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를 따먹고, 여름에는 산딸기를 땄다. 도회지에서 온 사촌에게 고무신 가득 피라미를 잡아주면 그 신기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산천에 피고 지는 풀꽃들과 열매들이 모두 친구였고, 그 속에서 뒹굴며 자랐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어떠한가. 모대학 교수의 논문이 생각난다.
요즈음 아이들은 시멘트 네모 공간에서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채 컴퓨터와 TV 등 전자 미디어 속에서 자란다. 동물도 풀꽃도 모두 애니메이션화 하여 전자매체를 통해서만 보고 느낀다. 고모와 삼촌, 사촌과 함께가 아니라 나 홀로 TV를 켜고, 인터넷 등 가상공간에서 논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전자적 의사소통으로 사회화된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미디어를 자연환경처럼 느끼고 호흡하여 문자로 의사소통 해 오던 구세대에 비하여 미디어가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핵심적 장치가 된다. 그래서 청소년의 정체성을 정의하기 어려운 모순적 존재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신분이지만 학생과는 무관한 대중스타, 스포츠스타, 만화, 전자게임속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데서 다중적이고 분열적 정신상태가 되며, 내적으로는 항상 불안과 긴장, 갈등을 겪으며, 심한 경우는 기성세대의 질서나 권위에 반항하거나 일탈·비행을 일삼는다. 아니면 모범생인양 완전 의존형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 공간이 단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가정, 미디어 공간에서 각기 다른 양식을 배운다. 이중에 학교와 가정에 비해 미디어의 영향이 커지면서 다중적이며 감성적이고, 소비적이며 이미지적으로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의한 가상공간의 특징인 그물형 네트워크 때문에 중심도 주변도 없게 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정보교환이 가능해졌고, 전 세계가 통합된 네트워크가 되다보니, 영토나 국경의 개념이 없어지고, 성, 인종, 계급 등의 현실적 위치가 필요 없게 되었다. 오로지 네트워크와의 접촉뿐이니, 학교의 권위가 붕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고 학부모가 교사를 고발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진다.
아이콘이나 그래픽은 가짜이며 기계일 뿐이다. 그러나 신세대들은 진짜 같은 인간으로 생각한다. 시공간의 압축과 연장이 자유로운 전자 기술문화를 통하여 인간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공인된 예술의 한 장르로까지 발전된 광고만 보더라도 소비자의 습관이나 문화 양식을 바꾸도록 유도하지 않는가.
거실에서 토끼를 키우며 입맞추고 쓰다듬는 손자의 모습에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아이들에게 친자연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다.
박 미 자(경상북도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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