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가 확보한 지구반대편 브라질의 제철원료공장을 취재하기 위해 나선 일행은 중간 기착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내려 항공스케줄 때문에 운 좋게도(?) 반나절 동안 이 도시에 머물다가 세계적인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생가를 잠시 들러 볼 수 있었다.
괴테의 생가를 복원한 이 곳은 이미 세계적 관광자원이 돼 200여년동안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쟁 후에 재건된 괴테하우스는 프랑크푸르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괴테가 태어난 방은 기념관이 되었다.
그가 집필하던 방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고, 즐기던 꼭두각시 인형극장은 책상 가까이에 있다. 괴테의 아버지가 아들의 출입을 지켜보기 위해 만든 서재의 창문이 지금도 있다. 괴테의 생가와 연관되어 있는 괴테 박물관에는 그의 생애에 대한 서류들과 작품들, 유명한 예술가들의 회화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괴테의 출생을 알렸던 프랑크푸르트 주간신문이 전시되어 있는 3층엔 괴테가 태어난 방이 있다. 4층 ‘시인의 방’에는 서서 쓰는 책상도 그대로 전시돼 있어 방문객으로부터 정말 값진 문화자산이자 관광자원이라는 찬사를 받고있다.
괴테가 태어난 집은 제2차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집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시민들의 노력에 의해 1951년 루이 16세풍으로 다시 복원됐다. 전쟁이 끝난 후 벽돌 조각 한장, 창틀조각 하나까지 일일이 모아서 완벽하게 복원했으며 생가에 있던 가구들은 전쟁중에 대피시켜 보존했었다고 하니 그 정성 또한 갸륵하지 않을 수 없다. 의자와 책상도 여기에 그대로 있다. 바로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서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괴테 생가를 그대로 복원하고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 이 도시가 문화도시로 깊이 각인됐고훌륭한 문학가가 머문 공간 하나면 이렇게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괴테의 집을 나서는 순간 문득, 경주가 배출한 한국문단의 거목 박목월의 생가가 뇌리를 스친다. 얼마전 경주 단석산자락에서 본 목월의 생가는 허물어진 채 쓸쓸하고도 초라한 푯말만 서 있었다. 경주시가 추진하던 목월기념관도 수년째 말만 오갈 뿐 첫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반면 전라도 강진땅 김영랑의 생가를 비롯 조지훈, 이육사의 생가는 문화당국과 자치단체가보란 듯이 복원해 훌륭한 문화자원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문화특별시’경주에는 신라천년의 문화재만 대접받고 있을 뿐 정작 현대문단이 배출한 국내최고의 문인 목월은 고향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더욱이 얼마 전에는 박목월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12년 동안 시를 썼던 서울 원효로 집마저 다세대 주택 신축을 빌미로 완전히 철거당했다.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가 그의 나라와 고향사람들의 노력으로 찬란한 관광문화자원으로 각광받는 이 순간에도 지역출신 시인으로 한국문단에 큰 획을 그은 목월의 생가는 허물어진 채 잡초만 무성하다.
그의 대표작 ‘나그네’의 한 구절처럼 목월은 지금도 저녁노을이 타는데도 갈곳 없이 아직도 강나루 건너 떠돌고 있는 ‘나그네’로 남아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이한웅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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