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시골농군의 아들이 객지에 나가 어렵게 공부하여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서울 한 검찰청의 검사로 발령 받은 그는 소위 VIP만 취급한다는 마담뚜를 통해 돈 많고 떵떵거리는 집안의 처녀와 결혼을 했다는데, 처갓집만 챙기고 통 시골집과는 연락이 없었다.
시골에 살고 있던 검사의 노부모는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척 궁금해 하다가 큼직한 보따리를 하나 들고 물어물어 아들집을 방문했다. 삼베로 짠 남루한 보따리 안에는 손수 짠 참기름이며, 아들이 좋아하는 송편, 어렵게 준비한 사돈 드릴 토종꿀도 한 되 들어있었다.
난생 처음 서울에 온 노부부는 아들네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저 기쁘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노모는 마당 한쪽 귀퉁이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눈에 익은 보따리를 발견하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정성 들여 준비해 간 그 물건들이 보따리 채 그대로 내다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며느리의 소행임을 안 노모는 영감을 재촉하여 서둘러 시골집으로 내려와 버렸다. 의아해 하는 영감에게 노모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영감은 더 노발대발하여 그 즉시 사람을 시켜 아들에게 전보를 쳤다.
‘아버지가 위독하니 급히 시골로 내려 오라’는 급보였다. 비보를 접한 검사는 휴가까지 얻어 헐레벌떡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병석에 누워 있어야 할 아버지는 마당에서 고추를 널고 있으면서 아들이 와도 본체 만체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검사는 아버지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며느리가 행한 행동을 아들에게 크게 꾸짖은 다음, 며느리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 부모를 포기하든지 마누라를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비장한 결심을 하고 서울로 올라온 아들은 부인에게 시부모가 정성 들여 마련한 물건들을 풀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내다버린 이유에 대해 따졌다. 그런데 부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보자기가 불결하고 내용물도 꺼림칙하여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기가 찬 검사가 부인을 나무라자 오히려 더 화를 내며 보따리를 싸 아예 처가로 가버리기까지 했다. 검사는 그런 부인과는 더 이상 같이 살수 없다고 결심하고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 뒤늦게 이유를 안 장인과 장모가 풀죽은 모습으로 검사 사위를 찾아왔다. 그들은 사위에게 딸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죄가 크다며 용서해 달라고 했다. 사위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받게되면 나도 용서하겠다고 하고 그들을 돌려 보내버렸다.
하는 수 없이 검사의 장인과 장모가 딸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찾아왔다. 이들은 툇마루 위에 검사의 시골 노부부를 모셔놓고 마당에서 엎드려 정중하게 용서를 빌었다.
딸 교육 잘못시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본 노부부의 화는 그 자리에서 풀어졌다. 아들과 며느리의 금실도 그 후 더 좋아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효심은 순수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한다. 효도는 인간됨의 시작이고 가정화목의 기초인데,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와 형제를 멀리하고 혼자만 쾌락을 탐한다면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5월 가정의 달도 이제 저물고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시절에 가정의 달을 정한 것은 자연에서 효심을 배우자는 뜻일 것이다. 봄볕이 가득한 산과 들에 삼라만상이 힘차게 약동하면서 함께 삶을 찬미하고 꽃을 발산한다.
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초목이나 곤충도 같은 무리는 함께 떼지어서 즐겁게 놀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써 부모형제를 멀리하고 혼자서만 쾌락을 탐닉해서야 되겠는가.
이 가정의 달이 다 가기 전에, 자녀들은 과잉보호하면서도 시골에 사는 부모형제와는 소원하게 지내는 가족은 없는지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자.
이 상 준(대구지검포항지청근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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