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월 걸친 대통령 탄핵 정국이 막을 내린지도 2주일이 지났다. 승자와 패자를 찾는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에게 충격과 고통만 안겨 주었던 시간이 지난 셈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탄핵 정국도 끝났으니 상생의 정치를 하자.”고. 필요한 말이고, 또 반드시 그런 세상이 도래하기를 소원해 보면서 문득 “상생의 삶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먼저 질문해 본다. 흔히 말하는 상생이라는 말 자체가 ‘너도 살고, 나도 살자’의 의미가 아니던가?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논리다. 모두가 더불어 잘 살아보자는 것을 반대할 사람도 반대해야 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상생의 이야기가 항상 가진 자들 편에서 나오고 있고, 힘 있는 자들 편에서 나오고 있다는데 있다. 사회적으로 상대적으로 많은 특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생을 외친다는 것이 상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애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상생은 자칫 “너희들이 우리 말 잘 들으면 다 잘 살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사실 서민들이라 일컬음 받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생이라는 말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 하면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누구를 해치거나 피해를 입힐 이유도 없다. 하루 일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상생이 무엇인지 그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일 수 있다. 그런데 상생이라는 말 자체가 누가 누구를 위한 말인지 그래서 헷갈리는 것이다.
기업가들은 모든 기업이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경영 원리를 부르짖지만 결국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모기업이 하층기업을 잡아먹는 것은 아직도 여전하다. 정치인들은 상생을 부르짖지만 국민들을 볼모로 하여 애매한 국민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 또한 여전하다. 어떻게 보면 상생이란 대등한 관계 속에서나 이루어 질 법한 논리지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이루어 질 수 없는 논리다. 그렇기 때문에 상생이라는 말이 항상 정치권에서, 대기업 쪽에서 먼저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상생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상생이란 누구누구를 이용하는 식, 자신의 주관적 입장을 정해놓고 상대방을 향해 자신의 주관적 상황 속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식의 구호적인 상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생의 외침은 또 다른 분쟁과 다툼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진정한 상생이란 내가 먼저 너에게로 다가가서 배려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 절친한 두 친구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한 친구가 잠을 자다가 갑자기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일어났다. 꿈에서 친구가 아주 수심에 싸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걱정이 되어서 그는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집안의 종을 깨워 그의 절친한 친구 집으로 즉시 보냈다. 친구에게 아무 일도 없는지 알아보게 한 것이다. 친구 하인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주인은 친구가 걱정이 되어서 자기의 종들을 다 깨워서 칼을 들게 하고는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된 두 친구는 서로 물었다. “ 무슨 일이 있는가?” 그 때 꿈을 꾼 친구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잠을 자는데 자네가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를 않겠나! 그래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해서 종을 보냈네. 그런데 자네는 왜 칼을 들고 왔나?”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친구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처럼 대답했다. “자네의 종이 밤중에 나를 깨워서 혹시 자네에게 몹쓸 일이 생겼나 하고 칼을 들고 온 것이라네.”
상생이란 서로 말이 없이도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이다. 상생하자고 소리칠 일도 아니고, 왜 상생하지 않느냐? 고 불평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상생은 내가 먼저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탄핵정국이 끝났다. 이제는 먼저 배려하고 포용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해 본다. 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