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떠나왔지만 떠나온 바가 없고 만났기는 하되 만남이 없는 그런 만남을 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얼핏보기에 대립으로 이어지는 삶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방해를 하고 험담을 하고 그래서 무척이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내 삶의 본질적인 면을 수용하고 내 속에서 소화를 해가지고 온갖 것을 부처님 생명으로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 불자의 본분입니다.
새삼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들여다 보십시오.
각자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나 어떤 걱정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눈한번 돌리면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이나 하늘거리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여전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온갖 것들은 언제나 나를 향한 공급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변덕스런 마음은 바쁘기만 합니다.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 기쁜 사건과 슬픈 사건으로 나누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삶 전체를 대긍정의 입장에서 볼때 불가에서는 이를 장엄이라고 합니다.
혹시 빛나고 화려하게 장식된 것만을 장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장엄의 본래뜻은 세상 만물이 두루 섞여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 그리고 빼어난 것과 모자란 것이 모두 함께 어우려졌을 때를 일러 장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여자들이 모두다 미스코리아처럼 생겼다면 아마 지겨워서 못 볼 것입니다.
또 모든 남자가 미스터코리아처럼 근육질만 모였다면 그것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있고 갖가지 사건들이 많습니다. 이팔청춘 시절을 그리워하다가 불현듯이 내가 십년만 젊었다면하는 아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이렇게 십년만 젊다면 하는 소리는 지금의 삶을 부정하겠다는 소리이고 “지금의 삶과 눈감겠습니다”하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이가 몇 살이든 최선의 조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생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미 그대로가 부처님 생명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생명이 간다고해서 가는게 아닙니다. 또 왔다고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흔히들 짝사랑의 추억이라든가 옛날 고향 언덕을 넘으며 맡았던 향긋한 들꽃 향기를 생각하는 순간 기분이 산뜻해짐을 느끼실 것입니다.
인간은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태어날때부터 각각 잘 짜여진 아떤 프로그램대로 살아가도록 되어있다면 꼭 자신의 인생이 이미 결정지어져 있다면 쫓기는 삶의 상태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야 어디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한정된 자기가 아닌 본래의 자기를 찾아서 대자유의 길을 가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운 봉(대성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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