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마리의 해오라비 새끼가 둥지 속에서 먹이를 잡아오는 어미를 기다리고 있다. 부화 된지 이미 몇 날이 지났음인지 덩치가 눈에 띠게 달라져서 맏이와 막내가 뚜렷하도록 구별이 간다.
어민지 아빈지 개구리 한 마리를 물고 날아든다. 적당히 공평하게 나눠 먹일 줄 알았더니 잡아온 걸 털썩 던져주고 잠시 지켜보다가는 곧장 사냥을 가 버린다. 새끼 두 마리가 물고 뜯고 늘어져서 찢겨지는 데로 꿀꺽 꿀꺽 삼키는데 덩치 작은 막내둥이는 그 난장판에 한 다리 끼지도 못하고 밀리고 튕겨지곤 하다가 끝내 맛도 못 보게 된다. 얼마 후 또 어미가 돌아와 먹이를 던져주고, 새끼들은 앞서처럼 그러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배가 불러진 덩치 큰 형들이 운동 삼아 힘겨루기 놀이를 시작하는데 허기진 막내는 반격은커녕 그로키 상태로 몰리다 마침내 탈진, 둥지 밖으로 떠 밀려나 천적의 먹이로 기다려지는 처참한 모습이 된다.
이렇게 둥지 속은 3형제의 공평하고 평화로운 행복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살기 가득찬 투기장이며 패자에게는 연옥이며 곧 카인의 둥지였다.
어쩌자고 해오라비는 알을 세 개만 낳았을까? 아예 둘만 낳아서 평등하게 알뜰히 키우면 아니 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겐가?
뒤늦게 둥지로 찾아든 어미 아비 새는 사라진 막내를 아예 찾을 생각도 않고 무심히 다시금 사냥을 떠나갈 뿐이다. 겉보기엔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자연의 세계, 그 속에 생존경쟁의 비수가 번쩍이고 있음이다.
온전한 존재를 창조하거나 지속 개발하기 위한 신의섭리는 결국 잔인하도록 처절한 자유경쟁인가 싶다. 33,333%의 포기가 66,666%의 건전한 존재를 지속 가능케 하는 비법인가 보다.
필자는 이런 저런 류의 평준화제도를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신의 섭리에 따르는 순리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르고 아름답게 세우는 유토피아적인 최상의 제도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번성하게된 이유는 치열한 생존경쟁 때문에 두뇌의 성장 진화가 유달리 빨랐던 탓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생존경쟁은 필수적인 것이다. 그 방법이 저속하거나 고상함의 차이 아니면 노골적이거나 은근함의 차이일 뿐 경쟁 없이 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경쟁의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곳에 어떤 새로운 악의 씨앗이 싹트게될지 그 것이 두려운 것이다.
교육제도의 변화에 있어서도 깊은 성찰을 요한다. 불철주야 공부에 메달리는 젊은이들이 불쌍타 여겨지는 것도 당연한 자비심의 발로이긴 하다. 하지만 자비심만으로 존재를 보장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평준화냐 비평준화냐를 문제시하여 다투는 것 자체가 이미 생존경쟁본능의 발로 아니겠는가.
이 날의 핵심 문제는 교육의 효율성을 정상적으로 높이는데 있는 것이지 어떤 제도의 반전에서 차세대들의 참교육이 절로절로 도출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기존의 제도를 양측의 진의를 반영하여 차곡차곡 개선하고 좀더 포용력 있게 관리 운영하는 데서도 충분히 그 해결점을 얻을 수 있을 터, 결코 제도의 극단적 반전만이 해결의 능사는 아닐 것이요 지나친 논쟁은 국력의 소모요 출혈일 뿐이다.
평준화 제도는 일률적으로 엇비슷한 규격의 작물들을 비슷한 조건 속에서 재배하여 최대한 다수확을 얻자는 것과도 흡사하다. 궁할 때에는 이러한 농법이 당장에 유익하겠지만 선진국에 들면 결국은 유기농이나 자연농법으로 회귀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인위적인 제도의 교육도 바로 그렇게 변하게 되어 있다.
지구촌에서는 경쟁이 없으면 자연이 아니다. 인위적인 모든 것들은 그 수명은 짧고 후유증은 길다. 인간 자신들을 위한 기법이지 신의 섭리를 따라가는 기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부 장관이 갈릴 때마다 교육제도는 곧 잘 찢기거나 뒤집히며 몸살을 해 왔다. 기존의 제도를 한 단계 위로 개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발칵 뒤집기를 하는 것이니 그게 탈이요 이 나라의 불행이다. 후라이펜에 계란을 뒤집기를 해서 구운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 주장하는 요리사와 그냥 뒤집지 않고 구운 것이 모양도 살고 맛도 좋다 주장하는 요리사와의 논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못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세상사 道法自然(도법자연)의 順理(순리) 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있을 순 없다. 2400년 전 노자가 외친 이 외마디 한 구절을 뒤집을 수 있는 영웅호걸이며 대 철학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락가락 갈팡질팡하는 교육제도 때문에 막상 피해를 입는 측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또 그런 와중에서 득을 보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교육제도도 중용의 도를 얻지 못하면 영원한 논쟁의 불씨 일 뿐 참 교육자의 꿈은 영영 표류 할 것은 뻔한 이치 아닌가 싶다.
이 삼 우(기청산 식물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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