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질문을 해 본다. “지금 우리 사회에 대화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가?” 말은 무성하게 많은데 과연 대화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질 때가 있다.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사회 각계각층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연 건전한 토론 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는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을 해 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이든 대화든 상대방을 인정함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 주변은 온통 말하는 화자話者만 있을 뿐 상대가 없다. 혹 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것은 복종의 대상이고 투쟁의 대상일 뿐이다.
남의 말을 귀 담아 듣는다는 것은 공동체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대화對話라는 말은 영어로 Communi cation이라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공동체라고 번역되는 Community라고 한다. 즉 대화라는 것은 공동체의 필수요건이라는 의미이다. 대화 없이 공동체는 형성될 수도, 유지될 수도 없다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그룹 또는 리더들에게는 더 없이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남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것이다. 1821년 나폴레옹의 군대는 러시아 침공에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가들 중에는 나폴레옹의 실패의 원인을 그의 자만심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그 자만심이란 곧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해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길에 오르기 전에 전문가들은 그 해의 날씨가 예년에 비해 훨씬 더 추울 것이라고 조언을 했다. 그들은 철새가 다른 해보다 빨리 이동하고 있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증거를 제시하면서 러시아 원정을 늦출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만에 가득 차있던 나폴레옹은 전문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프랑스 군대의 네이 사령관은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게 당시의 전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보! 우리 프랑스 군대의 행렬은 무시무시한 눈발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소. 낙오병들은 코사크 군의 깃발 위로 쓰러져 가고 있소.”
실제로 남의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자신의 자리가 명령을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더군다나 더 어려운 일이다.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자리와 위치에서 내려와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든지 힘이나 자리에 연연한다면 남의 말을 들어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나폴레옹의 경우도 그렇다고 본다. 실패할 줄 몰랐던,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밀어 붙이면 지금까지 성공해 온처럼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도 예외라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모들의 조언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러시아로 들어갔을 것이다.
공병호씨는 그의 <성찰>이라는 책에 일본의 마쓰시타 전기를 세운은 마쓰시타 고노스케 씨의 말은 이렇게 옮겨 놓고 있다. “나는 배운 것도 적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경영을 잘한다고 또 인재를 잘 활용한다고 평가한다. 나는 스스로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다. 내 눈에는 모든 직원들이 나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사장이나 회장이라는 지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직원들을 늘 꾸짖을 때가 많았지만 속으로는 늘 상대방이 나보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영 철학을 가진 마쓰시타 씨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것이 고작이었지만 평생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배웠다고 한다.
진정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라면 국민을 위대하게 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국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무엇을 더 원하고 있는지?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아우성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국가이든 기업이든, 아니면 학교이든 어떤 공동체이든 상관없다. 나 보다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위대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질 때 비로소 대화가 전제된 공동체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루속히 말만 무성한 공동체가 아닌 너의 아픔과 불편함을 쓰다듬어 주는 따뜻한 대화가 살아있는 그런 공동체를 희망해 본다.
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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