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초겨울이고, 초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낮 기온이 늦가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11월 끝자락에 서 있다. 완전겨울 아니기에 겨울 옷 입고 외출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완전 가을이 아니기에 가을 옷 입고 다니기도 뭐한 묘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책 한권을 통한 깊은 사색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양면성의 계절이 주는 혼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서점엘 갔다.
<2005년에 이루고 싶은 101가지>-<부제: 가까운 미래의 꿈을 실천하기 위한 신년계획 교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온 책이 나를 유혹한다. 흘러간 대중가요의 제목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아니 벌써!>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고 남는 나이를 살고 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 인생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뒤로 갈수록 빨리 풀린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내 마음 한 구석에 여운이 남는 것은 오늘 하루도 살기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2005년을 준비하라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하는 혼자만의 질문이다. 어렵고 힘들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웃들에게도 이 책의 저자가 힘주어 외치고 있는 2005년의 목표를 세우고, 월간, 주간 계획을 세워서 차질 없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일까? “삶의 목표가 없는 인생은 게으른 인생이다”라고 치부해버리는 듯한 저자의 말이 왜 그리 차갑게 들리는지. 그냥 좀 그렇다.
세상을 조금만 더 넓게 본다면 우리 주변에는 목표 자체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기막힌 상태에 빠져있는 이웃들이 부지기수다. 내일의 희망을 찬란하게 꿈꾸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내일 아침 끼니 생각을 해야 하고, 잃어버린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 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단기·중기 목표, 월간·주간 계획 같은 것은 너무 사치스런 외침이 아닐까?
계절이 주는 이중성의 혼란만큼이나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꿈꾸어야 할 우리네 삶의 주변은 몹시 어수선하기만 하다. 원치 않게도 삶의 바닥을 헤매는 이웃들이 눈에 보이도록 증가추세에 있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다. 바닥에 내려가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바닥인생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바닥 인생 자체를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데 슬픔이 있고 서러움이 있는 것이다. 2005년을 생각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바닥을 헤집고 그 바닥을 떠나보려는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정호승 님의 <바닥에 대하여>라는 시 한 편 올려본다.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 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2005년이 오기 전에, 스스로 바닥에 떨어졌노라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웃들이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바닥의 삶은 금년도 마지막 남은 한 달 동안에 청산되고, 더불어 2005년도를 소망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역설적으로 바닥이라는 것은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다는 의미, 즉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오를 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는 바닥에 머물러 있을수록 오를 일에 대한 꿈을 가지는 것, 그것이 곧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성공한 사람들은 말한다. <바닥 인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할 확률도 많다>고…. 바닥에 머물러 오늘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는 사치스런 격려의 말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바닥은 더 내려 갈 곳이 없는, 그래서 오를 일만 남아 있는 삶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2005년을 꿈꾸는 이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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