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나라가 대체로 그렇지만, 해변가 살기 좋은 곳은 유럽인과 그 혼혈들이 문명사회를 이루어 살고, 섬 가운데에 있는 산악지대에는 원주민들이 산다. 그들은 백인 꼬락서니가 우선 보기 싫고, 그 풍습이 마음에 안들고, 문명이란 것이 도대체 불편하고, 그래서 백인 안보이는데로 숨어들었다.
필리핀은 워낙 섬이 많은 나라여서 섬마다 색다른 원주민이 있고 특별한 신앙이 있고, 유별난 풍속이 있고, 나름대로의 음악과 춤과 축제가 있다. 이 구구각색의 원주민들은 ‘조상들이 살아온 그대로 살아간다’는 신념 하나에 충실하다. 조상을 향한 경로효친사상이 돈독하니 결코 ‘미개인’이라 할 수 없다.
필리핀 북쪽 루손섬에는 ‘동양 유일의 소인족’이 살고 있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흡사해서 키가 1m40㎝를 넘지 않는다. 이들이 백인 틈에 끼면 무조건 노예가 되니 산속 깊숙이 도망갈수 밖에 없다.
원숭이 처럼 새까맣고 볼품 없는 소인족이지만 그만큼 평화롭게 사는 사람도 없다. 깊은 산속에서 사는 이들은 일체의 통치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추장도 없고 통 반장도 없고 명령하는 사람도 명령 받는 사람도 없다. 문제가 생기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의논해 처리한다. 중국 도연명이 단편소설로 써낸 ‘무릉도원’이나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은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다.
필리핀 남쪽섬에는 ‘물개족’이 있다. 허구한날 물속에서 사니 물고기만큼 헤엄을 잘 친다. 이들은 관광객을 실은 배가 다가오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동전을 던져보라’고 한다.
사람들이 물속에 동전을 던지면 이들을 잽싸게 자맥질해 들어가 그 동전을 잡아낸다. 그리고 물위에 올라와 동전을 보여주며 싱긋 웃는다. 그 신기한 재주와 티없이 순수한 웃음이 보기좋아서 관광객들은 동전을 자꾸 던진다. 물개족은 그렇게 살아간다.
모로족이나 후크단 같은 억센 저항정신을 가진 종족도 있지만, 예로부터 갖고 있는 섬사람의 순수성을 버리지는 않았다. 막사이사이대통령을 암살하러 간 후크단원이 대통령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설득되어서 그 비서관이 됐다는 이야기는 이들의 本心을 잘 말해준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