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殷)나라 탕왕때 7년 가뭄이 계속되자 인심은 흉흉해지고 백성의 삶은 피폐할대로 피폐해졌다. 탕왕이 신하를 시켜 점을 쳐보니 산사람을 제물로 바쳐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러나 탕왕은 “백성을 위해 기우제를 지내는데 백성을 죽일 수 없다. 희생이 필요하면 내가 제물이 되겠다”면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첫째 나는 지금까지 바른 정치를 했는가. 둘째 백성들에게 충분한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는가. 셋째 국고를 물쓰듯하지 않았는가. 넷째 왕비나 후궁 그리고 자식들과 측근들이 설치거나 청탁이 많지 않았는가. 다섯째 뇌물등 부정부패가 만연하지 않았는가. 여섯째 아첨하는 자들의 말을 믿고 인사를 해오지는 않았는가. 이것이 탕왕의 ‘자책육사(自責六事)’. 천재지변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통치자의 무한책임을 엿볼수 있다.
세종대왕시절에 가뭄이 잦았다. 가뭄이 들면 왕은 음식 양을 줄이고 채식만을 하면서 비 오기를 빌었다. 그런데 세종은 하루 네끼를 먹을 정도로 대식가였으며 육식을 좋아했다. 가뭄은 세종에겐 신체적으로도 여간 고통이 아니었을 터. 왕은 재위 18년 6월 가뭄이 크게 들자 식사를 줄였다. 당시 세종은 병을 앓고 있었다. 신하들은 임금의 건강을 걱정해 감식(減食)을 만류했으나 왕은 신하들의 간청을 물리쳤다.
조선시대에는 천재지변을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왕의 정치를 문책하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자연재해가 통치자에 대한 경고라는 이론을 확립한 사람은 한나라 육학자 동중서(董仲舒)였다. 동중서의 재이설(災異設)은 격화된 절대권력자인 왕을 제어 할수있는 존재는 하늘밖에 없다는 관념에서 나왔다.
재이설에 충실했던 세종은 명군으로 남았으나, 재이설을 부정한 연산군은 폭군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90년만의 최악의 가뭄으로 온국민의 고통이 계속되자 청와대 인터넷홈페이지에 이에 대한 국민의 소리가 답지하고 있다고. “한발이 계속되면 왕이 정사를 잘못 본 천벌이라 하여 왕이 친히 몸을 깨끗이하고 기우제를 지냈다”등 내용도 다양하다. 김대통령은 이 기근속에 어떤 자책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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